- 조직민주주의 By 승근배
- 2025-11-05
- 188
- 0
- 0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은 없습니다. 이기심(Selfishness)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와 애덤 스미스(Adam Smith)에 의해 자기 이익(Self-interest)이라는 개념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에 의해 이에 반하는 단어로써 이타심(Altruism)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단어는 다른 시대에 등장했고 이 두 단어가 상호 반대말로 성립된 것은 19세기 말 경이라는 것이죠. 그 이후' 사람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사람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사람의 본성을 이기와 이타 사이의 어느 정도쯤 있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양자 간의 대립과 타협으로 퉁치다보니 사람의 본성인 자기애(Self-love)가 간과되고 있습니다. 자기애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자기애의 첫 번째 방법은 자기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자기 이익을 위한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 자기라는 존재는 죽고 없어집니다. 그것 만큼이나 자기애에 있어서 슬픈 일은 없습니다. 어떻하든 막고 싶지만 막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애를 이루는 두 번째 방법은 자기를 어딘가에 남기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남기고 기억되게 하기 위해서는 나 아닌 누군가에게 잘 해주고 유명해져야 합니다. 잘 해주어 기억되게 하고 선하거나 훌륭한 일을 해서 자기를 기억에 남김으로써 자기를 실현합니다.
본성인 자기애를 실현하는 방법은 자기보존과 자기실현입니다. 자기보존의 매카니즘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함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자기 중심적이어야 하니 타자보다 나를 우선시 합니다. 이와 반대로 자기실현의 매카니즘은 이타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그러나 자기실현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를 아무리 실현하더라도 타자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타자에게 잘 해주어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기나 이타는 사람의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기보존이나 자기실현을 위한 이타와 이기의 '행동'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타와 이기의 행동은 본성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 자기애를 이루기 위한 선택적 행동입니다. 본성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애라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사랑을 이루기 위해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타적 행동으로 드러나고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의 행동이 이기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본성은 오직 하나, 자기애 뿐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애덤 스미스가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궁금했던 질문들, 남의 이익을 우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는 어떤 원칙에 대한 저의 답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를 논하기보다 자기애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자기애를 자기 이익(Self-interest)및 이기심(Selfishness)과 구별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애를 19세기에 등장한 이타심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이익 및 이기심과 구별되는 자기애를 설명하기 위해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공정한 관찰자는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판단해 주는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재판관입니다. 자기애는 가장 본질적인 사람의 본성이라서 도덕에 어긋나는 과도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도덕적 범위 안에서 자기애를 이루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이때에 자기애를 도덕적으로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공정한 관찰자의 역할입니다. 공정한 관찰자는 사람의 내면 안에서 자기애적인 행동이 사회로부터 공감을 받을 수 있는지 판단하게 합니다. 만약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탐욕적인 행동이라면 공정한 관찰자에 의해 조절됩니다.
공정한 관찰자의 개념을 들여다보면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공정한 관찰자가 도덕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 되어준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항상 선해야하고 옳아야 합니다. 공정한 관찰자 덕분에 탐욕적인 자기 이익을 선택하는 자기애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공정한 관찰자와 나라는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 또는 이타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자기보존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공정한 관찰자는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이로인해 공정한 관찰자는 선하고 사람은 악하다는 인식의 오류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공정한 관찰자가 여럿이 아닌 단수라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공정한 관찰자는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고 가정해보고자 합니다. 공정한 관찰자는 여럿이어서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들이 있습니다. 어떤 공정한 관찰자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어하고 또 어떤 공정한 관찰자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또 어떤 공정한 관찰자는 이득을 취하고 싶어하는 등 각각의 목적들이 있습니다. 여러 목적들이 있음에도 모든 공정한 관찰자들의 최종 목적은 자기애입니다. 목적은 같으나 하위 목적들이 다르기에 서로 갈등합니다. 자기의 목적이 최선이고 최고의 가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공정한 관찰자들 간의 대화입니다. 하나의 선택 상황에 처해졌을 때 공정한 관찰자들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상호작용의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대화를 '내'가 귀 기울여 '잘' 들으면서 자기애를 이루기 위한 어떠한 결정을 선택합니다. 어떤 결정은 자기보존적 결정이라서 이기적 행동으로 드러나고 어떤 행동은 자기실현적 이라서 이타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행동의 결정은 결코 이기심이나 이타심이라는 본성이나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본성인 자기애입니다.
공정하다 함은 여럿이기에 가능합니다. 하나의 공정한 관찰자라면 공정할 수 없고 공정한 하나만이 우리의 마음을 조절한다면 공정한 관찰자는 항상 선해야 하며 공정한 관찰자는 신의 목소리이자 절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절대자에게 귀속되어 자기애를 처분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가 됩니다. 그러하므로 공정한 관찰자는 하나가 아닌 여럿인 '공동'의 관찰자이어야 합니다. 그 여럿인 '공동'의 관찰자들은 자기보존 또는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사람은 자기애를 이루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때에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 라는 고민도 아니고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마음의 결정도 아닌 오직 자기애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이나 이타심이라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아니고 타자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자신만의 주관적 결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애를 이루었는지 어떻게 확인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랑받고 인정될 때 자기보존이든 자기실현이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과 인정은 내가 보존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보존이든 자기실현이든 그 무엇을 이루게 된다면 그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자기애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인정됨은 자기 이익을 취한 가부나 정도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거나 어디에 남겨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 외에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실현과 자기보존 사이에서 자기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자기보존과 자기실현이 가능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일터가 그런 곳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 오늘도 출근을 하는 이유는 자기 이익 때문도 아니고 이기심이나 이타심도 아닌 오직 자기애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자기애를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려고 출근 한다면 그것은 자기애의 자기실현적 선택인 것이고 먹고 살라고 출근 한다면 자기애의 자기보존적 선택입니다. 어떠한 선택을 하든 본질이 자기애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하위목적과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하위목적과 방법이 정해지는 매카니즘은 선택 상황에 처해진 공동의 관찰자들간의 대화로 시작하여 자신이 그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나름대로 내린 결정입니다. 내려진 결정은 이기심과 이타심이 아닌 자기애에 있으며 자기보존과 자기실현이라는 하위 목적에 따라 이기와 이타의 행동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행동에 대해 그를 이기주의자로 매도하거나 이타주의자로 추앙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자기애를 이루고자 하는 본인의 선택인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자기보존보다는 자기실현이 좀 더 의미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자기보존보다는 자기실현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자기애라고 보는 이유, 사람이 자기보존보다는 자기실현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자기실현을 할 때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남겨질 여지가 자기보존보다는 더 크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라지는 사람은 어딘가에 남겨지고 싶어 합니다. 만약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라면 자기실현이 아닌 자기보존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억하는 존재이기에 기억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 이유로 자기실현 욕구가 자기보존이라는 생존의 욕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생존과 안전에서 소속의 욕구로, 소속에서 존중의 욕구로 나아가는 이유는 어딘가에 소속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기여를 통해 존중을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자기애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에는 이기심과 이타심이란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이기심과 이타심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 나에게 유익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할 뿐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가늠해보기보다는 단죄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좀 더 서로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탐욕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면 쉽게 잊혀질 것이고 소멸할 것이기에 그것은 결코 자기애를 이루는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보존은 기억되지 않는 무상의 자기애일 뿐입니다. 자기실현이야 말로 기억되고 남겨지는 자기애를 이루는 것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인 자기애를 이루기 위해 보다 많은 남을 위해서, 더 큰 선을 위해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공동선을 선택하기를 희망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에 남겨지는 자기실현을 이룰 때 이 사회는 더 건강해 집니다. 기억할 만한 사람이 없는 사회는 소멸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기억되고 남겨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번영을 이루어왔습니다. 사회가 소멸하여 기억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억될 사람이 없어 사회가 소멸하는 것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폐망한 국가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들을 보면 자기보존을 선택한 사람이 기억되고 있고 자기실현을 선택한 사람들은 소수이거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생명체들 중에서 사람만이 가진 매우 중요한 특별함입니다. 기억할 수 있기에 경험을 통해 배움을 축적할 수 있었고 축적된 경험은 역사가 됩니다.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기억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욕망을 통해 자기애를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호모종 중에서 호모 사피엔스만이 남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댓글
댓글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