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사유(思惟) By 이두진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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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 접근법: 현실적 한계를 넘어선 실천적 재해석과 유연한 적용
앞선 칼럼에서는 기존의 결핍 중심 패러다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주민을 주체적인 시민으로 세우는 강력한 실천적 대안으로서 자산기반 지역사회개발(ABCD) 접근법을 다루었습니다. 문제보다 자산에 집중하고 자산사정을 선행하라는 명제는 현장 실천가들에게 깊은 인사이트를 주지만 이상적인 철학을 실제 사회복지 현장에 그대로 투영할 때 실무자들이 직면하는 구조적인 모순과 현실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당장 생존을 위협받는 당사자의 시급한 문제 앞에서 자산사정만을 고집하는 것은 방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정부 예산에 의존하는 복지관의 예산구조는 내부자산과 외부자원이라는 이분법적 경계선이 불명확합니다.
셋째, 취약성을 증명해야만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한국 사회복지 행정의 구조적 현실은 ABCD 철학의 현장 안착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입니다.
본 칼럼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논리적 모순과 현실적 한계를 보완하여, ABCD의 핵심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현장에서 실현 가능한 형태로 재해석된 유연한 실천 전략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1. 위기 개입과 자산사정의 유연한 병행: '생존'에서 '존엄'으로의 전환
ABCD 접근법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자산사정을 선행하는 것입니다. 주민이 가진 잠재력과 공동체의 역량을 먼저 확인해야만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는 일분일초를 다투는 긴급한 위기 상황이 상존합니다. 거주지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가구,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중증 질환자, 가정폭력이나 학대 위험에 노출된 당사자에게 자산과 은사를 먼저 묻는 것은 현장의 맥락을 결여한 교조적 접근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즉각적인 제거가 필요한 시급한 부정적 조건 앞에서는 실천의 순서가 유연하게 조정되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서는 유연한 병행 모델이 필요합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긴급 위기 상황에서는 사후 처방적이고 즉각적인 개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공 및 민간의 긴급 지원 체계를 동원하여 당사자의 안전과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신속하게 확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즉각적인 위기 개입이 단순한 문제 해결이나 일방적인 시혜성 원조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긴급 구조를 통해 당사자의 상황이 최소한의 안정기에 접어드는 시점에, 실무자는 관점을 전환하여 자산사정 단계로 이행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처한 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면, 그가 가진 내면의 힘, 과거의 성공 경험, 주변의 사소한 관계망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긴급 구조가 생존을 확보하는 수단이라면, 자산사정은 그 생존을 바탕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삶을 주도하도록 만드는 동력입니다. 이러한 이원화된 병행 접근은 당사자의 고통을 방임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수동적인 수혜자에 가두지 않고 주체적인 시민으로 세우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가 됩니다.
2. 공식적 기관의 재정의: 외부자원을 내부자산으로 치환하는 '전환의 마중물'
전통적인 ABCD 이론은 자원을 지역사회 내부의 자산과 외부에서 유입되는 자원으로 명확히 구분합니다. 주민의 은사나 소모임은 내부자산으로 분류되며, 정부의 보조금이나 외부 전문가의 개입은 외부자원으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외부 자원에 대한 의존성을 경계하고 지역사회의 자생력을 강조하는 데 유용하지만, 일선 복지관과 같은 공식적 기관(Institutions)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현장과 괴리가 발생합니다. 복지관은 지리적으로 지역사회 내부에 위치하며 주민들과 긴밀한 인적 연결망을 맺고 있는 내부의 자산이지만, 현실적으로 운영 예산과 사업비의 대부분을 정부 위탁금이나 외부 공모사업비와 같은 외부자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식적 기관은 단순히 내부에 존재하는 고정된 자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외부자원을 내부자산으로 치환해 내는 전환의 마중물로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복지관이 외부에서 확보한 재원을 단순히 지출하고 배분하는 수동적인 전달체계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외부자원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재원을 지렛대 삼아 주민들의 숨겨진 은사를 발굴하고, 이웃 간의 관계를 맺어주며, 주민 주도의 자발적인 소모임을 결성하도록 지원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외부 공모사업 예산을 활용하여 마을의 유휴 공간을 조성하고 주민들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외부자원의 투입입니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소모임을 조직하고 서로를 돌보는 관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면, 외부에서 들어온 재원은 영구적인 내부의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처럼 기관이 외부자원을 활용하여 내부의 관계망과 역량을 조직화하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할 때, 공식적 기관은 비로소 지역사회의 진정한 내부자산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외부 자원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결합하고 전환되는 방식이 핵심입니다.
3. 한국적 실천 환경을 위한 '투 트랙 전략'과 번역가로서의 사회복지사
한국 사회복지 현장의 구조적 현실은 ABCD 철학을 전면적으로 적용하기에 매우 척박한 환경입니다. 정부의 위탁금 지급 기준과 공공 및 민간의 평가 시스템은 철저하게 공급자 중심이자 결핍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예산을 확보하고 기관의 성과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 지역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를 객관적인 데이터와 지표로 증명해 내야만 합니다. 제도는 끊임없이 결핍의 증명을 요구하는데 실천 현장에서는 자산과 가능성에 집중해야 하는 이 구조적 모순은 실무자들에게 깊은 무력감을 안겨주곤 합니다.
이러한 모순적 환경을 돌파하기 위해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은 전략적인 투 트랙(Two-Track) 접근을 취해야 합니다.
첫 번째 트랙은 거시 체계에 대응하는 행정적, 제도적 차원입니다. 외부의 재원을 확보하고 행정적 책무성을 다하기 위해, 제도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현실의 문제를 통계와 객관적 데이터로 명확히 입증하는 논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두 번째 트랙은 미시 체계에서 이루어지는 주민들과의 실제 실천 현장입니다. 예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는 결핍을 이야기했을지라도, 실제 주민을 만나고 사업을 기획하여 실행하는 단계에서는 철저하게 당사자의 은사와 지역사회의 자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전략적 번역가로 진화하게 됩니다. 사회복지사는 제도가 요구하는 행정의 언어와 현장이 필요로 하는 가능성의 언어를 자유롭게 조율하고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부에는 지역의 취약성을 근거로 예산을 청구하되, 현장에서는 그 예산을 주민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깨우는 자산 중심의 사업으로 변환하여 실천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치열한 투 트랙 실천과 성공적인 사례들이 현장에 축적될 때, 비로소 사후 평가 기준이나 정부의 위탁 시스템 자체를 자산 기반으로 변화시키는 거시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맺음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지속 가능한 실천
지금까지 논의한 유연한 병행 모델, 마중물로서의 기관 재정의, 그리고 전략적 번역가로서의 투 트랙 접근은 ABCD의 이상적인 명제를 훼손하는 타협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경직된 사회복지 생태계 안에서 자산기반 철학을 실질적으로 구현해 내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정교한 실천 전략입니다.
무조건적인 자산사정의 선행만을 주장하기보다 당사자의 시급한 생존권을 먼저 옹호하는 유연성, 이분법적 자원 분류를 넘어 외부 예산을 내부의 사회적 자본으로 바꾸어내는 역동성, 그리고 결핍을 요구하는 제도적 장벽 앞에서 가능성의 언어로 실천을 일구어내는 사회복지사의 전략적 지혜가 결합될 때 ABCD 접근법은 현장에서 강력한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도 정책이 사회복지현장의 혁신과 변화에 맞춰 개선되어야 하지만 거시 환경의 변화가 없다고 해서 본질적 실천의 지향을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결핍과 자산,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사회복지사들이 펼쳐내는 치열한 번역과 기획을 통해, 당사자가 삶의 주체로 우뚝 서고 지역사회가 상호호혜적인 공존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이 제도 정책의 변화로 이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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