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 본문

사회적고립, 꽃피는 봄이 오면

  • 사회적고립
  • 추억
  • 마천복지관
  • 정수진복지사
  • 복지밖복지

"그립긴 했어요"


서울시복지재단에서 주최한 사회적고립 교육이 있었습니다. 이번 교육은 당사자에게 직접 듣자는 취지로 두 분의 중년남성을 초대했습니다. 당사자 A 님은 어려서부터 지병으로 고생했지만,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어서 그래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이 결혼해서 떠나고 아버지마저 병으로 돌아가신 이후에 혼자가 되셨습니다. 터널 속의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 중에 인근에 있는 마천복지관 정수진 사회복지사가 똑똑똑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반갑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안 올 줄 알았는데 계속 똑똑똑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지 말라고 말도 해봤지만 잊을만하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다가 후원품을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A 님은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지 않으셨던 반년 동안의 마음을 묻는 말에 A 님께 하신 말입니다. 문을 열지 않고 타박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사람이 그리웠다고요.


사회적 고립 당사자를 찾아 나서는 것도 힘든 일인데 당사자가 방문을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실무자의 고민이 깊습니다. 거부가 아니라 건강한 의사 표현이라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막상 거부를 당하면 힘이 빠집니다. 재단의 사회적 고립 거부 대응 매뉴얼도 있지만 읽어서 아는 것과 실천은 다릅니다. 실천으로 이어갈 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을 동력이 필요합니다.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처럼요. 정수진 사회복지사의 실천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첫 번째 연료는 한 사람에 대한 애정입니다. 사회적 고립 과제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그건 이상한 일입니다. 지역사회를 사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공수표처럼 들립니다. 사회적 고립 과제가 아니라 고립된 한 사람을 아끼는 겁니다. 지역사회가 아니라 지역에 사는 고립된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번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도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찾을 힘이 생깁니다. 마천복지관의 정수진 사회복지사가 6개월 동안 그럴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지역 문제와 주민의 경제 상태처럼 보이는 현상에 집중했습니다.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제는 추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굳이 정신 건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정신 건강이라고 말하면 왠지 전문가의 영역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친구의 정신 건강을 치료하지 않고 친구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고립된 사람의 외형만 생각하면 중요한 마음을 놓칩니다. 6개월 동안 문을 열지 않았던 A 님의 현상은 거부였지만 본질은 그리운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의 시대에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고립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영국에 외로움 부처가 있는 것처럼 인류의 과제입니다. 환경 문제처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과제입니다.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잘하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회적고립은 단기간에 잘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눈에 띄는 성과가 없이 오랜 시간을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한 사람을 아끼고 한 사람과 마음을 나눠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게 보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길이 시작됩니다. A 님은 야구를 좋아하셨습니다. 정수진 사회복지사는 A 님과 야구장을 갔습니다. 좋았던 기억을 묻는 말에 A 님은 다른 질문과 다르게 망설이지 않고 말했습니다.


"정수진 사회복지사와 야구장을 간 거요. 그때 야구장을 갔는데 비가 엄청나게 와서…. 비를 맞으면서.. 와.. 그 기억이.."


그때 기억을 말하는 A 님의 표정에 생기가 넘칩니다. 고립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일상과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면 관계가 생기고, 관계에 시간이 더해지면 추억이 됩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추억의 힘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A 님은 추억이 생겼습니다. 복지관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고립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지역 주민과의 관계망이 넓어진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혼자 살고 있으시고 형편이 나아지신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런 환경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A 님과 지금의 A 님은 다릅니다. 겉모습은 같지만 지금 A 님에게는 사람이 있고, 추억이 있습니다.



참 모질었던 삶이었지만

늘 황폐했던 맘이지만

그래도 너 있어 눈부셨어



BMK가 부르는 '꽃 피는 봄이 오면'의 한 구절입니다. 참 모질었던 삶을 황폐한 마음으로 그래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과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수진 사회복지사는 A 님의 고립에 추억이라는 강력한 면역체계를 선물했습니다. 모진 삶으로 마음이 황폐해지면 떠올릴 비 오는 야구장의 눈부신 추억 말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을지라도 지금 우리는 누군가의 눈부신 추억을 만들고 있습니다. 눈부신 추억이 과하다면 흐뭇한 기억이라도 좋습니다. 처음 찾아온 사회복지사가 반갑지 않고 드문드문 방문할 때면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워도 표현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분명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날이 옵니다. 오늘도 어디선가 그런 추억을 선물하고 있을 정수진 사회복지사와 현장의 사회복지사님들이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누군가는 꽃피는 봄을 기다립니다. 



댓글

댓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