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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관둠(Quiet Quitting)
조용한 관둠(Quiet Quitting)

미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조용한 관둠(Quiet Quitting)'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직장에서의 새로운 규칙을 쓰고 싶어하는 MZ세대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는 이 현상을 워싱터 포스트지가 조명하였습니다. 조용한 관둠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책정된 임금 만큼만 일하겠다. 단순히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 퇴사하지 않는 선에서 일한다' 등의 의미입니다. 정리하자면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 또는 자기실현을 일 외에 다른 것에서 찾는 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사실 조용한 관둠이 신조어이기는 하지만 이 단어는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써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미국 구인 사이트인 레쥬메 빌더가 발표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1천명의 미국인 노동자 가운데 21%가 책정된 임금만큼만 일하고 있다고 응답하였다고 합니다. 이 조사 외에도 직장 내에서의 몰입도에 관한 결과들이 많은데요, 통상적으로 직장인들은 하루 8시간 중, 일에 집중하는 시간은 6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책정된 임금만 일하고 있다는 설문결과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두 결과를 단순 비교하여보자면 응답한 21%의 분들은 매우 솔직한 직원들이며 받는 만큼만은 열심히 일하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직원이라면 받는 임금의 120%는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내가 받는 임금분에 대해 자신의 노동을 100%를 기여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나머지 20%는 조직의 사장님을 위해 기여하라는 것이죠. 이 말이 낯설지 않은 분이라면 꽤 오랜 직장생활을 하셨을 것이고 듣지 못하신 분들이라면 젊은 세대일 듯 합니다. 만약, 몇일 전에도 120% 이상 일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씀하는 분이라면 직장에서는 꼰대라고 불리우실 듯 합니다. 임금의 100%만 일한다는 분들이 21%인 사회 상에서 120%를 주장한다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리더의 모습입니다. 조용한 관둠이라는 것은 현 시대의 MZ세대에게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세대 이전에도 조용한 관둠은 있어 왔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조용한 관둠에 대해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지 않을까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임금 이상의 헌신을 요구하는 사회는 지난 듯 합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3가지로 추려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내 삶의 소중함입니다. 평생직장이란 것이 사라지고 경쟁위주의 문화 속에서 결국 직장보다는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겠죠. 두 번째는 교환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저성장 사회에서 조직은 더 이상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지속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입장에서도 조직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세번 째는 조직에서 일에 대한 의미가 불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조직에서의 일이라는 것이 나의 미래와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해내는 만큼 조직에서는 무엇인가를 보상한다는 믿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조직신화들이 모여 일의 의미를 규정하여 왔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일은 하고 있으나 나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 합니다. 맘에 들만큼의 보상을 받는 것도 쉽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일은 하고 있으나 내가 정한 일의 바운더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설령 바운더리 밖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조직은 그에 대한 보상이 불분명합니다. 이렇게 일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면서 조용한 관둠이 선택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조용한 관둠은 있어왔던 것이고 지금의 경우에는 조용한 관둠이라는 것이 세계경제, 사회, 문화 등의 종합적 산물인 것이니 현 세대 만을 탓할 일은 아닐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조용한 관둠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일까? 조용한 관둠을 인정하면 어떨까? 임금의 120%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 꼰대의 의식이라면 100%로 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꼰대의 주장은 아닐까? 임금의 80%로 일하면 안되는 것일까? 솔직히 하루 노동시간의 60%로 집중하지 않는다면 임금의 80%만 집중할 수 있어도 성공한 조직이 아닐까?'저도 역시 한 때는 120%로 일해야 한다는 주장의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80%만이라도 집중해서 일하자. '그럼 나머지 20%는 조용한 관둠일까요?' 저는 20%를 가족을 위해 남겨두자는 주장입니다. 여기에서의 가족이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그 대상은 타인일 수 있겠고 취미일 수 있겠고 관심사 일 수 있겠습니다. 취미나 관심사는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겠군요. '그렇게 본다면 나머지 20%는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인, 사랑하는 내 자신 또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남겨두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20%를 위해 80%를 집중해서 일하는 조직문화라면 성과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은 120% 이상으로 일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고갈되어 오래 일을 못합니다. 120%로 일하고 퇴근하면 내 자신이나 그 어느 대상과 사랑할 시간과 힘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삶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그럼 일하는 의미가 퇴색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에서의 조직은 구성원들에게 120%를 원해 왔습니다. 구성원들은 실제로 그렇게 일해 왔습니다. 그것이 XY세대입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조직과 구성원과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조직에서의 교환이 XY의 세대에서 멈추어버린 상황에서 MZ세대에게는 교환할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은 세대가 변해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나의 삶과 미래,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조용한 관둠이라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조용한 관둠을 선택한 것입니다.'그럼 오늘날의 조직은 조용한 관둠을 관망하여야 할까요?'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앞서 말씀드린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 3가지를 조직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첫째, 구성원들이 조직에게 원하는 것은 나의 삶, 미래라는 것의 인정. 둘째, 조직과 구성원 간의 교환관계를 맺어야 함을 인정. 셋째, 조직의 책임은 일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라는 인정입니다. 이렇게 3가지의 인정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자유와 평등입니다. 구성원들은 XY세대이든, MZ세대이든 자유롭고 평등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나의 삶과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조직과 구성원들이 교환합니다. 조직은 구성원들의 역량과 능력을 원하고 구성원들은 자유와 평등을 원합니다. 역량과 능력은 억압이나 통제가 아닌 자유롭고 평등할 때 구현됩니다. 일의 의미는 그렇게 발견됩니다. '자유롭고 평등함을 허용하면 일을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구요?'이미 하루 노동시간의 60% 이상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21%는 임금 만큼만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당신이 원하는 만큼 일을 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감시할 수도 없고 처벌하기에도 애매합니다. 고급의 평가제도를 만들고 화려한 승진과 보상체계를 도입해도 구성원들의 행동은 잠깐 반짝 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통제의 방법을 쓰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사이드 프로젝트(Side Proj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계 외에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드입니다. 자신이 사이드 일을 선호하는 이유와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입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는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이며 사이드 프로젝트의 대상은 내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입니다. 세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바로 그것입니다. 조직에서도 사이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하루 노동시간의 20%에 대해 자율을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하든 조직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구애받지 않으면서 창발성이 발휘됩니다. 마냥 아무 것도 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쉬어야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레크레이션(re-creation)인 것입니다. 유수의 기업들을 보면 이런 제도들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조용한 관둠이 일어나는 시간을 사이드 프로젝트의 시간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조용한 관둠에 대해 비판이나 걱정하기보다는 이를 인정하면 어떨까요?' 어쩌면, 조용한 관둠의 현상은 일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연스로운 욕구가 분출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현금과 현물의 보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의 욕구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조용한 관둠은 무책임이나 나태, 무지에 의한 현상이 아닙니다. 자유롭고 평등함의 욕구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실현된다면 자신의 삶과 미래, 그리고 일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조직은 구성원들과 교환할 것이 없습니다. 구성원들도 예전에 조직에서 보상하던 현금과 현물에 자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교환하여야 될까요?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 조직이 허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자유와 평등입니다. 이제 자유와 평등을 구성원들에게 허용하고 조직에서 기대하는 바와 교환합시다. 구성원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허용하는 이유는 그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에게 주어진 사회적 문제와 사람의 욕구를 해결하는 사명에 기꺼이 참여한 자유로운 구성원들입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가진 역량과 능력을 다해 조직에 기여할 것을 열망하는 구성원들입니다.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으며 조직에게 필요한 자원을 채우고자 헌신하는 구성원들입니다. 조직은 그러한 기대와 믿음으로 그들을 뽑았고 그들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이렇게 구성원들을 인정하니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허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유와 평등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원하는 것이 나올리 만무합니다. 그들의 선택지는 조용한 관둠 밖에 없습니다.결국 조용한 관둠은 자유와 평등의 요구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제는 강제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인센티브로 유도하는 것은 소수의 관심사가 되어갑니다. 당근과 채찍으로는 이제 더 이상 반응하지 않습니다. 시켜서나 하고 눈치 것 하는 것으로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직은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원하나요? 자발적이고 헌신적이며 몰입하는 행동이지 않을까요?' 조직이 원하는 바는 자유와 평등의 인정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자발성과 헌신, 그리고 몰입은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에서 가능합니다. 다 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허용한 적이 없어서 망설여집니다. 망설일 수록 조용한 관둠은 지속됩니다. 조요한 관둠 속에 있는 구성원들을 탓하지 맙시다. 그들이 원하는 자유와 평등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조용한 관둠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평가와 보상으로 재촉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와 평등으로 구성원들을 촉진할 것인가'? 선택은 오직 조직의 몫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에게 자문해 봅시다. '나는 평가와 보상으로 촉진되는가? 아니면 자유와 평등으로 촉진되는가? 나의 동기를 무엇으로 재촉되기를 거부하는가? 평가와 보상인가? 아니면 자유와 평등인가?' 당신이 그렇다면 구성원들도 그러합니다.당신의 조직은 정의로운가예스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1716399알라딘 http://aladin.kr/p/gfpip교보 http://kyobo.link/0jH4영풍 https://www.ypbooks.co.kr/book.yp?bookcd=101188559

생태 관점 : 사회역할모델에서 주안점
생태 관점 : 사회역할모델에서 주안점

복지관 사회사업에서 '사회역할모델'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어도 온전한 '나'입니다.그 모습 인정하면서도아침에 눈 뜨면 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게 거듭니다.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어도 누군가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때때로 나눌 사람, 기댈 사람이 있어면 살아갈 만합니다.그런 둘레 사람 한두 명 세우는 일을 거듭니다.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어도 단 한 사람의 조건 없는 응원을 받는다면,그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그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응원할 겁니다.그런 관계를 주선하고 생동합니다.어려움 속에서도 사람구실, 사람노릇 하며 살아가게 거듭니다.그 가운데 희망이 보이고풀리지 않던 일의 실마리가 보일지 모릅니다.일상 속 다양한 관계의 그물에 놓여 있을 때삶의 생기가 돋습니다.사회역할모델,사회 속에서 역할을 찾게 거드는 방식입니다.이런 사회역할모델의 주안점은 생태, 강점, 관계입니다.사회역할모델을 좇는 사회사업가는당사자와 지역사회를 만나면 무엇을 주의 깊게 살피냐는겁니다.

복지관 사회사업에서 '생태 관점'

‘생태’는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회사업에서 ‘생태’는 ‘개인과 환경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특히, 사례관리 업무에서 당사자의 문제를 ‘생태’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이때 문제는 어느 한 쪽에 의해서만 생겨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당사자의 문제는 그 사람의 역량이나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 따위가 이유일 수 있지만,

그런 당사자와 어울리지 못하는 환경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이상을 요구하는 환경에 놓이면 그는 ‘문제 있는’ 사람이 됩니다.

어느 한 쪽 만의 이유로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즉, 생태 관점에서 ‘문제’는 양 체계 사이의 역기능적이거나 부적응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사자나 그가 속한 환경, 어느 한 조건만으로 문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나쁜 조건도 그 속에 놓인 당사자와 상호적응의 결과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개인과 환경을 따로 보지 않고 서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회사업가는 당사자를 이해하려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상황 속에서 개인을 살핍니다.

당사자와 그가 속한 환경, 이 둘 사이를 좋게 만드는 일을 궁리합니다.

개인을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개인과 환경의 상호적응을 돕습니다.

사회사업가는 개인과 환경, 둘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이 원만하게 거드는 존재입니다.

생태 관점으로 당사자를 돕는 사회사업가는 당사자를 돕기 위해 개인과 환경,

혹은 공유 영역 가운데 어느 체계를 지원할지 궁리합니다.

사회사업가의 정체성과 처지와 역량에 따라 진입 체계를 선택합니다.

각 체계마다 순차적으로 들어가 지원할 수도 있고,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상황과 사안과 역량에 따라 결정합니다.

중요한 건, 어느 한 체계만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회사업가이기에 개인과 환경 두 체계를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하고, 이런 관점이 정체성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를 돕는다고 할 때

그 아이의 가족이나 담임 선생님, 친하게 지내는 친구, 혹은 아이가 믿고 따르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마땅한 과정입니다.

아이의 어려움이 그 아이와 둘레 사람 가족 친척 친구 이웃 사이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쉽고,

그 해결도 그런 둘레 사람과 관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아이 한 개인을 돕기도 하지만,

그가 긴밀하게 관계하는 둘레 사람을 거들어 그들이 아이를 위한 긍정적인 행동에 나서게 하는 일이 아이를 변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사업 생태체계 실천」 (양원석, 푸른복지) ‘사회사업 정체성과 정의’

사회사업은 당사자 체계가 일방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지 않습니다.

이는 당사자 체계가 환경체계를 바꿀 수 없으며 환경체계는 고정불변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생태체계 이론에 근거한 사회사업 적응이 아닙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서 일방적응은 없습니다. 인간과 환경이 상호적응 합니다.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서 부적응(인간과 환경이 어떤 상태를 일정 기간 유지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상호적응입니다)은 없습니다.

현 상태가 어떠하든 이미 환경과 적응한 상태입니다.

비록 외면, 대립, 적대, 지배, 억압, 경쟁 등의 상태라 해도 이 또한 이미 적응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회사업이 추구하는 상호적응은 다릅니다. 사회사업은 여러 적응 중 서로 돕고 나누는 공생을 추구합니다.

생태 관점 도식

⒜는 개인 영역, ⒝는 환경 영역, ⒞는 공유 영역입니다.

사례관리 업무로 당사자를 도울 때는 사람과 상황과 사안에 따라

‘⒜개인’을 지원할 수 있고, ‘⒝환경’이란 바탕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사회사업 현장에서는 ‘⒞공유’영역에 들어가 양 체계의 상호작용을 개선하려 애쓰는 듯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는 양 체계가 만남으로써 나타난 문제입니다. 문제에 직접 대응하는 겁니다.

이 일도 귀하지만 자칫 당사자가 사업의 ‘대상’이 되기 쉽고, 궁극적으로 환경도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라면, 특히 복지관 사회사업가라면

양 체계가 만나는 ⒞공유영역에서 생긴 문제에 하나씩 대응하기보다,

양 체계의 바탕을 살리는 데 힘쓰는 편이 좋습니다.

⒜개인의 욕구나 역량을 거들면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게 돕거나,

⒝환경 영역에 들어가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관계 소통을 도움으로써 다양한 사람(개인)을 품을 수 있게 합니다.

당사자와 여느 사람이 이용하는 일반 복지 수단 사이 관계,

이 둘 사이가 잘 어울리게 하는 일이 ‘생태’를 생각하는 실천입니다.

이때 ‘환경’은 당사자 둘레사람 뿐 아니라 일반 복지 수단도 포함합니다.

대체로 복지관 현장에서는 (우리 처지와 역량을 살펴) 이 환경을 ‘당사자의 둘레 사람’ 정도로 한정합니다.

당사자가 만나온 사람, 만나고 있는 사람, 만나면 좋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개인 영역에 들어가 문제에 대한 면역력과 적응력을 갖게 하고,

⒝환경 영역에 들어가 타자에 대한 수용력과 포용력을 갖게 하는 일이야말로

생태 관점으로 실천하는 사회사업가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양 체계를 균형 있게 살핀다고 했지만, 사회사업가는 ‘⒝환경’의 변화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다양한 개인의 욕구나 역량을 지원하는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만납니다.

복지관과 사회사업가의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지역사회란 ‘환경’의 공생성이 높으면

그 속에서 다양한 ‘개인’은 둘레 사람의 관심과 지원과 응원 속에서 그럭저럭 어울려 살아가게 됩니다.

당장 벌어진 문제에 대응하는 일도 둘레 사람과 함께 해결해갈 수 있지만,

나아가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는 데까지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환경 영역을 생동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현장을 생각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실천 방법입니다.

사회사업가다운 접근입니다.

사각지대가 아니다
사각지대가 아니다

복지 정책과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용어로 ‘사각지대’가 있다. 이제는 관용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지금 시점에서 단어의 의미를 진지하게 다시 짚어봐야 한다. 왜냐면 사각지대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각지대는 운전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일부 지역처럼 제대로 갖춘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미흡하거나 영향이 미치지 못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그런 뜻에서 지금 한국 사회의 복지 문제에 적합한 단어는 사각지대가 아니다. 물론 아무리 제도가 잘 갖춰졌어도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런 경우라면 제도가 미치지 못한 문제를 찾아서 일부 개선을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제도의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개선이 아니라 전면적 보완이 필요하다. 전달체계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 복지 재원의 부족에서부터 원인을 찾아야 한다. 사실 깊이 탐구할 필요도 없다. OECD 기준 복지 지출만 비교해도 분명한 답이 나온다.용어 선정부터 신중하면 좋겠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겠다. 작년 기준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3.4%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 압도적인 1위다. 참고로 OECD 평균은 15.3%다. 이 간단한 수치 하나만 보아도 '사각지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아니 현실을 심하게 왜곡하는 말이다. '사각지대'가 아니라 '위험지대'이고 '공공방임'이다‘수원 세 모녀’ 사건으로 다시금 사각지대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과연 사각지대가 문제인지 되물어야 한다. 정부의 대응책처럼 복지 정보체계를 보다 촘촘히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생각처럼 핫라인을 개설하고 시민들의 생각을 모으면 혁신적 해결 방법이 나올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정부와 경기도의 대책은 기본 안전망이 갖추어졌다는 전제에서만 유효한 답이다. 그래서 갈 길은 멀지만 먼저 용어부터 바꿀 것을 제안한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현실을 왜곡하지 않기 위함이다. 사각지대가 아니라 공공방임이다. 뉴스에서도 ‘수원 세 모녀’ 사건으로 부르지 말고 ‘수원 공공방임’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 문제를 가족과 개인으로 축소하지 말아야 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사각지대 뒤로 숨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사각지대가 아니라 공공방임이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을 묵도해야만 하는가?물론 복지 전달체계가 보다 촘촘해져야 하고, 이웃관계망도 작동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공공의 복지재원이 절대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거창한 복지국가 담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북유럽 복지제도를 목표로 삼자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한국의 경제와 사회 수준에 맞는 사회안전망은 갖추자는 말이다. 사실 이나마도 김대중 정부의 공이다. 기초생활보장과 4대보험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윤석렬 정부의 기조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자연증가분을 빼면 사실상 감액이다. 그러면서 복지 사각지대를 없앤다는 정책목표는 마음껏 먹으면서 살을 빼자는 말처럼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일선 공무원을 압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민간의 헌신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첫 단추부터 다시 끼우자. 그리고 우리부터라도 이제 '사각지대'라는 표현을 금하자. 생각이 말로 나오지만, 반대로 언어가 생각을 지배하는 법이다.한겨레신문(2022.8.31)에 기고한 글(사각지대가 아니라 공공방임이다)을 재구성했습니다.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Ⅱ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Ⅱ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Ⅱ   ‘새마을운동은 주민을 동원’했고, ‘찾동은 주민에게 돈을 줬다.’ 그런데 최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생태계가 생겨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즘 것들은 돈을 내며 공동체를 찾는다.’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Ⅰ> 첫 번째 칼럼 보러가기(클릭 시 이동)

요즘 것들의 공동체   앞서 언급한 4번의 변동과정에서 발전해온 공동체에 대한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목표, 자원, 의식에 대한 동질성을 형성해가는 것을 전제했다. 그러나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 사유는 기본적으로 차별을 만들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결사성이 강조될수록 개인은 소멸한다. 사회복지학에서는 다양성의 존중과 차이의 인정해야 함을 강조한다. 개별화는 그러한 가치의 적극적 이론화이다. 다양성,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과 배제는 안 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동체 회복 활동은, 특히 공동체 사업은 동질성을 중심으로 기획되는 경향이 강했고, 단계와 절차에 있어 획일성을 강요받았다.   행정이 주도했던 공동체 사업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새마을운동은 주민을 동원’했고, ‘찾동은 주민에게 돈을 줬다.’ 그런데 최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생태계가 생겨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즘 것들은 돈을 내며 공동체를 찾는다.’ 이러한 관계망은 순전히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딱 한 번만 만나거나, 온라인에서만 만나기도 한다. 익명으로 소통하고 모임의 주제, 성격,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소위, 요즘 것들의 사람 만나는 방식이다. 이들에게 기존의 ‘긴밀한 공동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느슨하고 유연하다. 또한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출처 : https://naamezip.com/(남의집)   분명한 건 이러한 모임이 시나브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상업적 서비스가 증가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런 모임에서는 기존 정책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젊은 세대가 모여든다. 한 마디로 이러한 소모임의 특징을 정리하긴 어렵지만, 이들 모임이 갖는 특징은 지리적 범위 탈피와 느슨하고 유연한 관계이다. 기존 행정이 접근성 높은 공동체 공간을 확보해 사업을 추진하려는 것과 달리 이들은 로컬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모인다. 지근거리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도시와 도시를 넘나들며 만난다. 또한 매체의 발달은 이러한 모임의 공간성을 파괴했다. 오픈 채팅방,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의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서 익명성을 갖고 대화를 나눈다. 이들의 만남은 정기적이지 않다. 필요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모임을 하면서 정기성과 지속성을 갖는 경우도 생겨나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모임을 전제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모임의 즉시성과 유연함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멤버십이라는 전통적 공동체의 상을 탈피시켰다. 맛집 세트 메뉴를 같이 먹는 모임, 반려견 산책 모임, 여행 이야기를 나눔모임, 요가모임 등등 소소한 일상에서 친구나 이웃들과 함께했던 활동들이 이러한 모임에서 가볍게 이루어진다. 뭔가를 같이 하는데 있어 형식과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최자와 참여자가 서로 가볍게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정기적인 출석이 요구되는 모임으로 전환되어도 규칙의 제정으로 주최자와 참여자의 부담을 줄인다. 사람들이 관계 맺는 수준은 매우 다양하다. 모임을 주최하는 사람도, 참여하는 사람도 서로 부담 없이 가볍게 제안하고 받아들인다. 지속적이고 엄격한 출석이 요구되는 모임에서도 리더가 이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불참자는 사전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참여를 일부 제한하거나,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     행정은 공동체 생태계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실,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행정은 막대한 예산과 인력,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다.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정은 다소 미지근했고 결과는 지속가능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소모임이 자발적으로 생기고 심지어 돈을 지불하면서 참여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그렇다고 기존 행정의 공동체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거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정은 여전히 주민을 지역 주체로 세워 정책과 연결해 가야 한다. 주민 개인의 관심사가 이웃 관계로 이어져 지역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행정의 공동체 정책은 주민 한 명의 문제가 곧 지역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연결·확장성을 가져야 한다.공동체 생태계의 변화는 행정이 지역 기반의 마을 공동체 정책과 더불어 새로운 형식의 소모임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를 제시한다. 이는 새로운 생태계에 정책으로 개입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여러 토양에서 생겨나는 공동체의 씨앗과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그들의 에너지를 지역사회와 연결하는 것이다. 생태계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과 관련 정책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로 충분하다. 당장 행정의 필요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공적 활동과 접점을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지역기반 마을공동체 형성을 촉진하는 것도 여전히 필요하다. 정주의식을 갖추기도 전에 빈번히 주거지를 옮겨야 하는 현실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고정된 관계망이 아닌 열린 관계망으로, 형식과 내용이 지역의 토양과 특성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정의 역할은 연결의 문화가 곧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조력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요즘 것들은 공동체의 형식과 내용을 일상 세계에서 스스로 만들어간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공동체 회복을 위한 활동은 동질성을 중심으로 기획되는 경향이 강하며, 전통 공동체를 상정하고 기획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동체를 사유할 때 최근의 공동체 생태계 변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도 접근할 필요에 대한 시그널을 준다. 이제까지의 공동체가 “동질성의 요소(공동의 목표, 자원, 의식)를 지키고 강화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우리와 차이 나는 요소와 우리가 결합하여 만들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시기가 온 건 아닐까.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제도 정책과 결합한 광범위한 변화의 시도였을까? 아니면 우리 사회를 공동체적 사회로 만들기 위해, 즉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전제된, 각자의 시작과 연결이었을까. 요즘 것들의 공동체에서 정답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방향에 대한 모색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요즘 것들의 공동체(희망제작소, 2022.04)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 성과평가와 정책과제(서울연구원, 2017)현대 시대에서의 공동체란 무엇일까(https://hochiriranalysis.tistory.com/45)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Ⅰ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Ⅰ

‘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Ⅰ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입니다_김훈(2007, 중앙일보 인터뷰)”     요즘은 아파트도 공동체가 대세!   최근, 십여년이 넘게 공동체에 대한 화두는 사회 곳곳에서 넘실대었다. 한국 사회에서 꽤 오랜 기간 ‘종교’와 ‘지역’에 강력한 소속감과 통합성을 부여했던 공동체가 제도와 정책으로 공공화(公共化)된 후 ‘아파트’ 같은 건축과 건설에까지 접목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공동체 논의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같이 빠르고 응축적이다. 제도 정책으로의 편입은 ‘속도전’을 방불케 했다. ‘공동체 회복’은 동질성뿐만 아니라 기술복제의 ‘동일성’을 가졌다. 새마을운동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공동체는 전통적 공동체에 대한 인식적 향유를 가지지만, 산업화의 과정에서 제도 정책과 결합 되어 획일화된 접근 방식으로 전개된 특성이 있다.  출처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58907.html남양주 별내 위스테이 아파트 협동조합   공동체는 배제를 전제로 한다.   사실 공동체의 본래 속성은 배제를 전제로 한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의 어원에서 볼 수 있듯, 공동체의 동질성은 ‘차이’를 배제함으로 유지된다. ‘차이’의 배제는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강하게 결속시킨다. 과거, 우리 사회의 전통적 공동체는 혈연, 지연, 종교성에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었다. 피와 땅과 정신에 근거해 동질성을 공유하고, 이에 위배 되는 개인을 강력하게 배제함으로 유지되었다.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어 낸다.   현재, 한국사회의 공동체는 전통적 공동체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또 다른 배제의 속성을 기본전제로 갖고 있다. 그것은 ‘사회화’와 ‘산업화’ 그리고 ‘제도화’에 근거한 동질성이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대표적 예다. ‘장애’라는 몸이 갖는 사회적 이질성은 ‘비장애’라는 몸이 갖는 사회적 동질성에 위배 된다. ‘매끄럽지 못한 몸’으로 장애를 바라보고 무질서와 비정상의 사회권 침해로 이들을 매도한다. 정상적이고 아름답다고 정해진 몸의 형태는 없다. 시대와 사회마다 사람들이 만들어온 주관적 기준이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사회 다수의 공동체는 장애에 대한 차별로 동질성을 확보(클릭 시 넘어감)하고 있다.   서울시 마을지원사업 성과평가와 정책과제(2017)   제도 정책화된 마을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마을지원사업 성과평가와 정책과제(2017)’에 따르면,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은 적게는 약 13만 명의 새로운 시민의 등장을 성과를 10년 동안 제시했지만, 30~40대 여성, 중산층이 전체 참여자의 70%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10대~20대와 30~40대 남성, 50대 이상의 시민의 참여율은 현저히 낮았다. 2016년 서울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에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장애인, 돌봄이 필요한 아동, 1인 가구 비혼여성, 시니어’ 등을 ‘비참여 집단’으로 명명하고 이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별도사업을 추진하려 했으나 실효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엄밀히 보자면 이들은 비(非)참여 집단이 아닌, 배제집단이었다. 처음부터 ‘차이’를 염두 하지 않고 설계된 제도 정책으로, 사업 추진 이후 기존의 구조 안에 배제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은 실효성을 거두기는 쉽지 않다. 참여의 범위와 지속성은 주민보다는 중간지원조직에 더 편중되었다. 행정적 단계를 거치며 행정에서 요구하는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수록 주민 참여자의 수는 크게 줄었다. 오히려 확대 재편과 지속성을 가졌던 건 중간지원조직뿐이었다.     공동체, 네 번의 변화   서구에서는 약 110여 년 전부터 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 공동체는 전통적 공동체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차이’의 배제, 즉 동질성을 전제로 유지되는 한편, 동질성을 극복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서로 대립하며 발전한 역사적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변혁은 크게 4번의 변동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 변혁, 많이 들어봤지?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   지역사회복지론 교과서에서 많이 들었을 페르디난트 퇴니스(1912)의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와 이익사회(게젤샤프트)의 개념이다. 110년 전에 주창된 이 개념은 공동체의 특성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현대사회의 본격적인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퇴니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 이후 게마인샤프트 사회가 정당, 회사와 같은 이익과 능률에 따라 의지적으로 형성된 사회인 게젤샤프트로 구분되는 사회적 변화를 통찰하였다. 이후 두 개념을 축으로 공동체에 대한 특성과 형태, 과정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변혁점, 개인이 없으면 공동체도 없다!   공동체는 어떤 정해진 형태나 상황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개념으로서 공동체화를 제시하는 사유이다. 여기서부터 강조되는 점은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이다. 에밀 뒤르켐, 막스베버, 게오르크 짐멜 등과 같은 학자들은 과정으로서의 공동체화 속에서 다양한 논의를 이어간다. 게오르크 짐멜은 ‘개인 법칙’이라는 책에서 윤리와 당위라는 것은 대부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정당성이 계속해서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각 개인이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고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른데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법칙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타자화된 법칙, 즉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법칙에만 집중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문제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에 집중함을 강조한다.   세 번째 변혁점, 공동체는 없어진 게 아니라 새롭게 존재해!   탈 전통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사유이다. 하버마스, 바우만 등이 대표적 학자이다. 이들은 현대사회의 공동체는 모두 소멸하고 없다는 것에 반대하고 현대사회는 새로운 공동체(탈 전통공동체)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에서는 개인의 등장을 넘어 공동체의 기본단위에 개인에 있음을 강조하고 개인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공적인 논의 보다는 나의 이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나의 이해가 공통의 범주화가 되면서 우리의 이해로 전환된다. 즉, 개인의 문제를 지역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의 아이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우리 아이들의 문제로 전환되는 질적인 변화, 육아협동조합과 같은 이슈별, 이해별 공동체 운동이 이러한 현상의 예이다.   네 번째 변혁점, 마이클 샌덜 열풍! 어디로 사라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