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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선 여러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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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라고 갑작스레 질문받은 여러분,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당신의 혀는 ‘나쁜 것’이라는 발음을 만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 누군가 혀로 만든 발음을 입으로 발성(發聲)한다. 그 때 나는 기습적으로 “라고 물어보는 질문이 틀렸죠...” 라고 말한다. 사회복지 담당자 또는 참여주민들을 위한 지역복지, 주민조직 역량강화교육 현장에서 내가 간혹 사용하는 참여자들의 허를 찌르는 질문기술이다. 


주민조직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많을수록 불편함이 증가할까? 구성원이 적을수록 불편함이 증가할까? 그렇다. 구성원의 수가 많을수록 불편함도 증가한다. 구성원이 열심히 할수록 불편함이 증가할까? 열심히 안 할수록 불편함이 증가할까? 그렇다. 열심히 할수록 불편함도 증가한다. 그렇다면 불편하지 않기 위해 주민조직을 안 하고, 구성원들도 열심히 하지 않도록 해야하는가? 이러한 모순은 ‘불편함’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이해에 기인한다. 불편함은 느낌이다. 느낌은 ‘좋다, 나쁘다’는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느낌은 자연상태다. 자연상태를 가치평가하게 되면 갈등이 깊어진다.


교육현장을 상상해보자. 여러분은 참여자이고, 나는 강사다. 강사인 내가 교육중간에 말을 멈추고, 강의실 뒤편에 착석한 당신에게 눈 맞춤 한다. 심지어 다가가기 시작 한다. 당신은 속으로 ‘설마 나에게 오는걸까? 에이. 아닐 거야...’ 그런데 강사가 점점 다가오는 모양이 나를 겨냥한 듯하다. 분명해졌다. 내 눈을 노려보며 내 앞까지 왔다. 나에게 온 게 맞다. ‘왜 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아닌데... 열심히 집중한 건 아니지만 강사가 나를 노려보면서 다가올 정도로 잘못한 건 없는데...’ 별라별 생각이 뇌리를 과열시키고 있다. 심지어 내 앞에 온 강사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에 가까이 하려고 한다. “잠깐! 강사님 제가 뭘 잘못했나요ㅠㅠㅠ”, 강사는 질문한다. “지금 느낌이 어떠십니까?” 강사는 참여자에게 계속 얼굴을 들이댄 채 질문한다. ‘다행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니구나...’, “강사님이 가까이 오셔서 불편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강사는 “어이구 죄송합니다.” 라면서 바로 제자리로 간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렇다. 강사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는가? 그건 아니었다. 강사는 교육참여자와 쌍방향 강의를 위해 나름 오버액션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의도와는 다르게 참여자에게 불편을 주었다. 강사의 ‘열심’이 참여자의 ‘불편’을 만들었다. 이때 참여자는 강사의 ‘열심’을 ‘나쁘다’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합한가?


그런데 참여자가 강사가 다가왔을 때 “강사님이 너무 가까이 오셔서 제가 좀 불편합니다”라고 말하는게 쉬운가? 어려운가? 어렵다. 그래서 불편하다는 말을 못하면, 강사는 자신의 ‘열심’을 참여자가 좋아하는 줄로 착각하고, 계속 거기서 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면 참여자는 오랜 시간 불편을 감수하다가 ‘불편함’은 ‘분노’로 전환된다. 참여자의 분노는 ‘강의평가서’에 반영된다. 그 이후 과정은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참여자가 “~~~해서 제가 좀 불편합니다”라는 용기만 내었다면 강사가 무례한 자가 아닌 이상 간단히 종료될 상황이었다. 이렇듯 불편에 대한 오해는 모든 관계와 조직, 사회적 갈등과 소외의 출발이자, 인간사(人間事)의 파노라마다.


당신이 사는 공동체에 ‘다양성’이 많아지면 좋은가?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대다수는 ‘좋다’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복지사, 사회복지 담당공무원이라는 페르소나(가면)을 쓰고서 당신이 사는 공동체에 ‘다양성’이 많아지면 좋은가?라는 질문앞에 서보자. 과연 ‘좋다’라는 대답을 자신있게 할 수 있을까? 공무원 교육현장에서 참여자들에게 다양성이 많으면 좋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 공무원 참여자들은 ‘나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어떤 반응도 없다. 왜냐하면 공무원도 퇴근 이후는 내가 사는 곳에 다양성이 많으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이든, 사회복지사든 지역사회에 다양성이 많아지면 불편함도 증가하고, 할 일도 많아지게 된다. 즉 주민과 조직원이 많아지면, 주민과 조직원들이 공공활동에 열심히 하면, 주민조직에 다양성이 많아지면 ‘불편함’도 증가한다. 이것이 ‘불편’에 대한 객관적 상황이다. 주민조직을 통한 성과인 조직된 주민, 공적이슈에 대한 뜨거운 관심, 다양성 확대는 ‘불편함’을 촉진한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지자체에 40년전 시장, 군수가 힘이 쎘을까? 현재 시장과 군수가 힘이 쎌까? 40년전에는 지방자치제가 없었다. 대통령이 임명했다. 아마 40년전 시장과 군수가 100배는 더 강했을 것이다. 현재는 그 힘을 시장과 군수를 뽑는 시민과 군민들이 가져갔다.(이게 민주주의, 분권, 권력분산 과정이다) 그렇다면 그때가 더 시끄러웠을까? 지금이 더 시끄러울까? 지금이 더 시끄럽다. 그때가 갈등이 많았을까? 지금이 더 갈등이 많을까? 지금이 더 갈등이 많다. 그때가 선진(先進) 지자체인가? 지금이 더 좋은 지자체인가? 지금이 더 좋은 지자체인 것은 분명하다. 즉 현재가 과거보다 더 시끄럽고, 갈등이 많으나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더 훌륭한 지역이 되었다. 이것이 참여민주주의의 힘이며, 주민조직을 하는 이유다. 


즉 주민조직은 지역과 마을과 모임을 조용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는 자연인이다’로 가면 된다. 주민조직은 적절한 갈등, 적절한 시끄러움을 만들고, 유지하는 분야다. 적절한 갈등과 시끄러움은 적당한 불편함을 만든다. 주민조직의 성과는 ‘마을의 적당한 불편함’이다. 인류는 ‘불편함’을 만들어가면서 ‘문명(文明)화’를 이루었다. 혼자서 의사결정하는 것이 빠른가? 여러명이 의사결정하는 것이 빠른가? 혼자서 의사결정하는 것이 피곤한가? 여러명이 의사결정하는 것이 피곤한가? 여러명이 의사결정하는 것이 느리고, 피곤하다. 그것이 민주주의(民主主義)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피곤하고, 어색한 ‘불편덩어리’다. 독재는 빠르고, 효율적이며, 자연스럽다. 우리 지역, 마을, 조직을 영향력 있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알아서 하라면 불편함도 줄어든다. 그러나 지역과 마을과 조직은 점점 사람들이 떠나게 되며, 활력을 상실해간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피곤하고, 어색하고, 불편함 그 자체이지만 지역, 마을, 조직을 생명력 있게 만든다. 그것을 ‘활성화’라는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활성화(活性化)란 불편함을 감수하는 과정이다. 


어떤 변화든 변화를 맞닥뜨린 개인과 조직의 첫 번째 감정은 불편함이다. 사람은 적응(適應)의 동물이다. 나쁜 습관과 관행, 불의와 부정도 적응(適應)해버리면 자연스러워진다. 적응은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의 가치판단을 형해(形骸)화시킨다. 개인과 조직과 사회의 ‘적응된 현재’를 해방(解放)시키고자 하는 것이 주민조직이다. 주민조직을 통해 변화(變化)와 해방이라는 성과를 만들었으나 그 수혜를 받은 주민들과 이용자, 지역과 조직은 초기 적응과정의 불편함으로 예상하지 못한 불평과 비난, 뒤담화를 겪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당연히 여기는 모든 개혁들의 국민 반응을 언론을 통해 찾아보면 초기엔 불만 여론이 높았다. 주민조직 활동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열심과 성과에 대한 불만스러운 평가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도록 주민조직 담당자는 참여주민들에게 ‘불편’에 대한 객관적이고, 적확(的確)한 이해를 위한 대화시간을 설계하는 역량이 요청되며, 필요한 역량을 ‘민주적 역량’이라고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복지는 하나이며, 주권재민과 시민참여 없는 복지국가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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