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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는 아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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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사

제 아내가 아이들과의 대화하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아내는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요구할 경우에 사전 예고를 합니다. 예를 들어 5분 후면 어떤 이유에 의해 집을 나설꺼야, 10분 후면 밥을 먹을꺼야. 오늘 식사 시간이 빠른 것은 이런 이유야' 이런 것들입니다. 아이가 재미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갑자기 집을 나서가나 밥을 먹으러 오라하면 놀이를 중단해야 합니다. 아이는 이 상황이 싫습니다. 엄마의 요구를 거부할 것이고 떼를 쓰겠죠. 언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전에 예고를 하면 이런 어려움이 감소되더군요. 아이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전에 예고 했음에도 아이가 거부를 하면 아내는 설명을 부연해 해줍니다. 아이는 아내의 설명을 들으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전 예고나 설명은 아이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시간을 통해 스스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아내의 설명은 정확합니다. 예를 들어 '주사는 아픈거야, 따금한 거야, 주사를 맞아야 아프지 않아, 그래야 재미있게 놀 수 있어' 주사를 맞은 후에도 '잘했어, 엄마 말대로 따금했지? 이제 재미있게 놀 수 있어' 주사 이후의 보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것이나 장난감을 사줄 것이라는 보상의 제안은 당장은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잘못된 기대를 갖게 합니다. 만약, 아픔 이후에 보상이 끊긴다면 아픔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겠죠. 아이는 주사 맞기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성장해가면서 보상이 없는 고통을 멀리 할 수도 있겠죠.




아내는 주사를 맞은 이후에 '떼찌 떼찌, 누가 아프게 했어?' 하며 주사탓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엄마 말 안 들으면 주사 맞으러 간다' 나 '주사 안 맞으면 병에 걸려 죽는다' 등 주사를 맞추기 위해 위협하지 않습니다. 아픔의 이유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주사 공포를 통해 행동이 교정되더라도 오히려 주사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칫 병원 앞에서 자지러지게 울 수도 있습니다. 이 덕분인지 아이들은 병원에 가는 것이나 주사를 맞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다. 또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생활 속에서 찾아오는 새로운 어려움에 대해 잘 이겨내는 듯 보입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애정 표현을 자주합니다. 일어날 때도 안아줍니다. 깨울 때는 항상 하이톤으로 아침인 것을 알려주죠. 절대로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야 일어나' 거칠게 말하지 않습니다. 등하교 때에도 아내는 아이들을 꼭 안아줍니다. 아이들과의 입맞춤도 쪽 소리를 크게 내어줍니다. 저도 아내의 행동을 따라합니다. 아내와 아이들과의 대화가 더 없이 좋기 때문에 따라합니다. 아내처럼 아이들을 꼭 안아줍니다. 중학교 2학년 첫째 아들은 아직도 저에게 입맞춤을 해줍니다. 그렇다고 아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좋은 모습들이 더 많습니다. 


사람은 예측할 수 있으면 삶의 주도권을 갖게 됩니다. 주도권을 갖게 되면 재미가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다면, 갑자기 상황이 돌변한다면 사람은 두려워집니다. 두려운 사람은 삶의 의존성이 높아지게 되고 수동적인 선택을 합니다. 항상 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리게 됩니다. 재미가 있을 리 없습니다. 두렵지만 의존적이지 않은 사람은 저항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닌 타인의 결정을 거부합니다. 이 역시도 재미가 없는 삶입니다.  사전 예고나 설명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정보를 통해 사람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는 삶의 주도권입니다. 리더가 지시와 명령보다는 사전 예고나 설명을 통해 여러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보의 공유가 단절되면 구성원은 저항하거나 수동적으로 변합니다.


정보는 명확해야 합니다. 여러 목적을 담으려 하면 정보는 부정확해집니다. 주사를 맞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 외의 것들은 목적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떼찌 떼찌 하며 주사탓을 하게 되면 주사의 목적은 상실됩니다. 주사를 맞으면 무엇을 주겠다는 약속은 건강을 위한 과정은 사라지고 보상이라는 결과만이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직에서의 일에 대한 설명은 다른 곁 가지가 아닌 일을 하는 '이유'이어야 합니다. 이 일이 끝나면 무엇을 주겠다는 설명은 일의 목적을 보상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일 때문에 힘든 것이라고 격려하려 한다면 그것은 일 탓을 하는 것입니다. 일의 목적이 상실됩니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해야 되고 일을 하는 과정 안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을 해내었을 때 기대되는 바는 어떤 것임을 설명해야 합니다. 선택은 설명을 들은 구성원들이 하는 것이죠.




보상이나 위협을 통해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폭력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사를 맞으면 보상을 준다는 것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보상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주사의 첫 번째 위협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주사를 놓겠다는 것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주사에 대한 두 번째 위협입니다. 여기에다가 '주사를 안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라는 세 번째 위협을 가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사를 맞고 우는 아이들 앞에서 '누가 그랬어? 떼찌 떼찌 호~' 자신들이 가한 위협을 주사 탓으로 돌립니다. 주사에 대한 목적은 사라지고 여러 다른 목적에 의해 주사는 위협이 되고 공포가 됩니다. 아이들이 병원 앞에서 우는 이유입니다. 부모들은 사라진 주사의 목적 때문에 병원 가는 일이 스트레스입니다. 더 강력한 보상 꺼리를 찾아 제시하고 더 무섭게 위협하고 더 모질게 주사 탓을 합니다.   


목적과 과정이 정확하게 설명되어 진다면 주사를 맞는 일은 공포가 되지 않습니다. 잠시 따끔할 정도만 지나가면 없던 일이 되어버리죠. 근래에는 주사 맞은 후에 예쁜 스티커도 붙여줍니다. 마치 큰일을 해낸 훈장과도 같습니다. 조직에서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보상과 위협이 아니라 왜 이 일을 해야 하고 과정이 설명된다면 그 다음은 구성원들이 선택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조직이 함께 해주면 될 일입니다. 마치 주사를 맞을 때 엄마가 옆에 있어 주는 것처럼 말이죠. 주사를 맞을 때 옆에서 엄마가 꼭 안고 있다거나 주사를 맞은 후 꼭 안아주며 '잘 했다'라고 다정하게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조직의 역할도 그러합니다. 


말 한마디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서 말을 배웁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말을 배웁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아이들에게서도 말을 배웁니다. 제 아이가 들려줬던 말 한마디에 의해 제가 새롭게 태어난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의 아들이 4~5세 정도였을 때 였습니다. 저를 안고 제 귀에 'OO이는 아빠가 참 좋아요, 꾸이야(꾸이야는 아들이 기분이 좋을 때 하는 추임새입니다)' 지금도 부모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를 때 였습니다. 그 때 아들이 준 그 말이 '아, 내가 이 아이의 아빠구나,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라는 것을 각성시켜 주었습니다. 자녀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었고 '내가 부모로서 인정받는구나, 한 존재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말의 고마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자녀에 대한 애정 표현이 늘었습니다. 저도 역시 수시로 아이들을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빠는 OO이가 너무 좋아 꾸이야' 중학교 2학교 남자아이를 안아주면서 하는 말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입니다. 조직에서도 이러저러한 표현을 합니다. OOO님 덕분입니다. OOO님이 있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아이에게서 배운 다정한 말을 쓰는 것이죠. 


일하는 목적과 과정이 명확하고 서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문화가 된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조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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