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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진척시키는 모순에 대한 통찰

  • 모순
  • 공감
  • 투사
  • 대립적모순
  • 발전적모순

확실히 예전에 비해 논쟁이나 토론을 자주하지 않는다. 경험상, 문제를 해결하거나 일을 진척시키는 과정은 대립적 모순의 관계 보다는 발전적 모순의 관계가 훨씬 유용하다.

 

뭐든지 뚫는 창과 절대로 뚫리지 않는 방패는 대립적 모순관계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사실 대립적 모순은 논리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대립 전제의 가정이 갖는 모순일 경우가 많다. 세상의 모든 논리는 이항관계가 있다. 논리적으로 완벽하다는 단정적 가정은 또 다른 완벽한 논리적 단정을 전제로 한다. 논리적 단정을 유지하기 위해 쌓아가는 모순의 관계는 피로도가 높다.

 

완벽한 창과 방패가 꼭 대립적이어야 할까? 창과 방패는 꼭 싸워야 한다는 대립 전제가 해체되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순이 갖는 발전적 관계는 긴장감이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한 창과 방패는 서로 부딪치지 않아야 비로소 완벽해진다. 긴장감을 편안하게 다룰 수 있는 여유가 결국 통찰이다.

 

낮은 성찰은 논리적 분석에 근거하지만, 높은 성찰은 공감에 근거한다. 공감을 전제로 한 분석은 단정 지어 던지기 전에 한 번쯤 단정의 근거가 본인에게 있는지 타자에게 있는지 통찰하는 성숙이 요구된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투사다. 투사란 자신의 생각, 느낌, 태도 등등을 타인 또는 다른 대상에 귀인 시키는 행위이다

 

투사는 공감과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투사는 정서가 포함되지 않을 수 있는 인지적 과정과정이라는 점과 둘째, 그 방향이 타인에게서 자기에게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향한다는 점이다. Dymond(1950)은 공감자가 그 대상과 분리되어 있고 중립적이라는 측면에서 투사와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공감적 반응은 자신과 타인이 분리된 개체라는 분명한 인식이 존재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타인에 대한 심정적 반응은 투사일 가능성이 높다.


낮은 수준의 통찰은 구조를 분석하는데 국한되지만, 높은 수준의 통찰은 구조 안의 나를 이해하는 확장성을 지닌다. 공감이란 유모차를 끄는 아기의 엄마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삶을 느껴보는 것과 같다. 유모차를 끌기 전까지 몰랐던 높은 턱 투성이 길가와 움푹 패인 도로, 자동차 중심의 도보 제한성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공감능력이 상실된 사회는 그 걱정이 유모차 안의 아기에게만 제한되었을 때 나타나며, 그 공감의 상실은 아이의 전생애에 걸쳐 누적적으로 쌓여 아이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부모가 착각하는 것은 그 상실된 공감의 범주 안에 나는 제외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심리이고, 채워지지 않는 부모와 자식의 공감은 교환가치, 투자가치가 우선하게 된다. 누군가는 일시적, 제한적으로 겪는 상황을, 누군가는 전생애를 거쳐 안고 간다. 공감능력의 회복은 그 상황에 대한 문제 인식과 해결과제를 개인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문제로의 이심전심을 갖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미지 출처 http://m.hsjn.co.kr/zoom_photo.php?img_url=http://www.hsjn.co.kr/upimages/gisaimg/202105/25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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