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사유(思惟) By 이두진
-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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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
“내 방에는 이미 가난 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_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조문영의 책 '빈곤과정'을 읽었다. 용어 중에서 '시좌'란 말이 눈에 띠어 찾아봤다. 관점과 비슷한 말인데 다른 말로 이해된다.
시ː좌, 視座명사
1. 지식 사회학(知識社會學)에서, 개인이 자기의 입장에서 사회를 보는 시점(視點)·좌표.
2. 사물을 보는 자세. 시점(視點).
가난의 시좌
조문영은 시좌를 설명하면서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을 언급한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소설속의 ‘나’가 도금 공장 노동자 상훈이와 살을 부빈 그 방에는 가난이 고여있다. 연탄가스 냄새와 셋방 이부자리에, 옷에 흥건히 가난이 배었지만, 상훈과 ‘나’가 같이 살면서 방세를 줄이고 연탄을 아낀게 여간 다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난에 절망한 가족이 연탄불을 피워놓고 몽땅 죽었지만 ‘나’는 그들이 두려움에 주검과 맞바꾼 가난을 온전히 껴안을 수 있었다. 언젠가 일류 재봉사가 된 뒤에도 상훈이 멕기 공장 노동자로 남으면 어쩌나 살짝 고민도 되었다. 상훈과 함께 하는 내일이 있다면 가난은 거부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사라진 상훈이 말끔한 차림새로 나타난 순간 ‘나’는 절망했다. 그는 부잣집 도련님인데다가 대학생이고 아버지의 훈게로 고생 좀 해보려고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했다며, ‘나’를 꾸짖고 교화한다. 연탄을 아끼려고 남자를 끌어들이는 삶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며 이런 끔찍한 생활을 청산하고 제집 와서 잔심부름이나 하란다. 이 꼴로 갈 수는 없으니 옷이라도 사 입으라며 상훈은 돈을 건네자 ‘나’는 갖은 욕설을 퍼 부어 그를 내쫓았다. 그는 ‘나’의 가난을 훔쳐갔다. ‘나’는 가난의 의미를 돌려받을 길없이 “쓰레기 더미에 쓰레기를 더하듯이” 제 방에 부끄러운 몸을 던졌다.
1975년에 쓰인 이 소설은 가난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한 가난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가난 속에서도 존재하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자존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상훈이 개입하면서, 가난이 동정의 대상이 되고, 그녀의 자존감마저 훼손된다. 외부인의 시선과 도움이라는 이름 아래 그녀가 누리고 있던 가난의 순수성이 훼손되며, 이는 가난이 단순한 물질적 상태가 아니라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시대가 지나며 가난에 대한 의미는 점차 달라졌다. 도둑맞은 가난에서 이야기하는 가난에 대한 따듯한 인간성과 자존감의 의미는 오늘날 또 다른 수많은 ‘나’와 외부인의 관계에서 다르게 이해된다. 가난의 범주는 지극히 상대적이다. 타워펠리스에 살고 학생이 차를 끌고 건물 한 채는 소유한 건물주어야 잘 사는 것으로 인증 받는다. 어느 대학의 한 학생이 20억 짜리 집을 소유한 제 가족을 “전형적인 하우스 푸어 중산층”으로 소개하며 언급한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은, 국가 장학금의 학자금 지원 구간에 맞는 가난에 대한 등급으로 학업을 이어가는 대학생들에게 도둑맞은 진짜 가난에 대한 억울함과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 일으킨다.
가난에 대한 인증은 제도와 정책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요소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자 기준에 대한 논쟁, 수급자의 기준은 가난에 대한 최소 기준이다. 타워펠리스와 임대아파트의 간극 만큼이나 먼 가난에 대한 기준은, 같은 시대에 가난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살면서 한 번도 수급과 인연을 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시좌에 가난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을까? 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난의 시좌가 타워펠리스를 기준으로 형성되면서, 복지는 무관심과 차별 속에서 정치적 수사와 예산 압박을 오가며 엄격한 자격심사와 최소한의 지원 수준으로 타협되어 왔다.
시좌와 관점
‘보는 지점[관점]’(point of view)이 달라지면 동일한 대상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반면 ‘보는 자리[시좌]’(position of view)가 달라지면 풍경 자체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맨 앞줄에 앉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맨 뒷줄에 앉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 어떤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들이 볼 수 있는 것과 변방/경계에 서 있는 이들이 볼 수 있는 것의 차이, 그것을 이 ‘시좌’라는 용어로 담아낼 수 있다. 관점은 그 자리에서 대상(의 다른 면)을 보는 방법이고, 시좌는 다른 자리에서 배경을 포함한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은 시좌와 관점의 차이를 서 있는 곳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풍경으로 설명한다. 누구나 자기 당파성을 갖고 있다. 당파성을 성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진보적인 부모라도 자기 자녀 문제에 대해서는 이기적이 된다. 관점은 보편성과 평등이지만, 시좌는 다르다. 어렸을 적 부터 한강의 소설을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부모와 살았던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출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통찰과 성찰은 잘 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복지의 언어와 관점이 일상의 삶에서도 동일성을 갖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어디서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미지 출처 : https://tv.jtbc.co.kr/photo/pr10010388/pm10032247/detail/6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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