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WISH지기
- 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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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사회복지사의 업무일지가 발견되다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돌프 페르로엔, 내인생의책, 2009)
2백 년 전 서구 제국주의 시절 남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 수리남에 사는 농장 지주의 딸 ‘마리아’가 쓴 일기가 발견되었습니다. 평범한 사춘기 소녀의 일상이 적힌 순수한 일기. 예상과 달리 그 내용은 끔찍했습니다. 당시에는 평범했을지 모를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는 잔혹하게 다가옵니다.
“노예 네 명이 뚜껑이 있는 쟁반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빠는 힘이 세다. 아빠는 쟁반 뚜껑을 손수 열었다. 한 작은 게 보였다. 쟁반 안에서 몸을 잔뜩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그게 몸을 일으켰다. (…) 꼬꼬란다. 아빠가 말했다. 우리 마리아에게 주는 어린 노예지. 엘리사베트 아줌마가 준 선물은 작은 채찍이었다.”
마리아가 14살이 되던 해 받은 선물은 작은 흑인 노예와 채찍. 그 뒤 마리아는 당시 여느 어른들이 그러하듯 노예를 짐승처럼 부립니다. 모두 그러하니 사람을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일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의식’이 없는 겁니다. 알려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 그렇게 노예를 짐승 부리듯 했으니 그 일이 문제란 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여느 사람처럼 흑인을 짐승이나 물건으로 여겼고 그런 이야기를 일기에 적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일기가 2백 년 뒤에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순수한 소녀의 일상이,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녀를 ‘악녀’라 부른 겁니다.
“노예들은 마부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흉터가 있는 노예와 꼬꼬는 밧줄로 서로 묶여 있었다.…마차는 작은 방 같았다. 아늑했다!…아빠는 정말 자상하셨다. 먹을 때마다 아빠는 내게 먼저 맛있는 걸 골라 주셨다.”
“어떤 노예가 도망갔어요. 이웃사람이 그 노예를 잡아 데리고 왔어요. 지금 채찍으로 스무 대나 맞고 있어요.…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후식을 맛있게 먹었다. 엄마도 맛있다고 했다. 난 조금 더 먹고 싶었다.”
노예의 비명 속에서도 맛있게 식사하는 엄마와 마리아. 그들은 노예의 고통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그저 자신의 성숙과 액세서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일상의 조각이 모여 악녀라 불립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붙은 악녀라는 말에 억울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의식 없이 저지른 일에도 무거운 책임을 지웁니다. 스스로 악녀가 된 이를 벌하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상황을 바로 알지 못한 이에게도 같은 죄를 묻습니다. 의식 없이 살아온 게 죄가 될 수 있다니, 섬뜩합니다.
우리 사회복지 현장에서도 ‘선배들이 그래 왔으니까’, ‘교수님이 그렇게 하라 했으니까’ 하며 별생각 없이, 의식하지 않고 당사자를 대상화해 오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마리아를 수식했던 ‘악녀’가 우리 이름 앞에 붙어 있지는 않을지 섬뜩합니다. 지금은 후원 공모에 매달리는 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고, 공짜 돈 얻어오면 일 잘했다고 하니 정말 그런 줄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사자를 일감으로 여기며 대상화하여 일방적으로 서비스하는 일도 어느 현장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상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2백 년 뒤에 이런 사회복지사의 일지나 보고서를 읽은 후배 사회복지사들이 그를 악마 사회복지사라 부를지 모릅니다.
악녀일기는 사람 사이 관계가 왜곡되었을 때 벌어지는 끔찍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회사업은 ‘관계’로 시작해 ‘관계’로 끝나는 일입니다. 책은 그런 우리에게 악녀란 오명을 듣고 싶지 않으면 현장에서 만나는 이와의 관계, 그 당사자와 둘레 관계가 왜곡되지 않았는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책 속에서 사람을 물건처럼 ‘이것저것’이라 부르는 모습이 무섭습니다. 대상화하는 겁니다. 식민지배자 네덜란드 사람들은 수리남으로 끌고 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그저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타인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못합니다. ‘의식’이 없으니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무엇을 향하여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 내 실천이 악마의 행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지금은 이렇게 할지라도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현실 탓하며 그저 순응할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받는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바꾸는 것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고 이것이 변화를 끌어내기도 합니다.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 내가 감당할 몫과 내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돕는 이를 우리와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생각합니다. 도움을 받는 이들을 대상화하는 사업과 그런 용어를 경계합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이에 민감합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타자를 대하는 악녀 마리아를 통해 더욱 관계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서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드는 사회복지사의 역할이 중요함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더불어 살게 돕는 사회복지사의 정체성을 단단히 붙잡습니다.
노동이나 결혼 같은 이유로 피부색과 말이 다양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우리 사회. 그러나 그들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와 그 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앞으로 2백 년 후의 악녀일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지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의식 없이 살아가면 사회복지사도 역사 앞에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실천이 후세에 어떻게 기억되고 해석될지 궁금합니다. 설마, 당사자와 지역사회를 인격적인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악마는 아니겠지요? ‘2백 년 전 악마 사회복지사의 일지가 발견되다…’ 아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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