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사유(思惟) By 이두진
- 20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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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머리 좀 비우려고 예배 시간에 인근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 인근에는 제법 규모가 큰 신천지가 있다. 카페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청년들이 많아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천지 소속 청년들이었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전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상황에 따른 세밀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서로 피드백한다.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어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호기심이 생겼다. 나누는 이야기 자체보다도 그들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들이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대화 속에서 몰입의 이유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사실 인간은 몰입상태에 놓일 때 행복감을 갖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칙센트 미하이 칙센트는 『몰입의 기술』에서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돈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몰입 상태’를 일으키는 활동을 통해 즐거움을 찾고 지속적인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몰입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과정인 동시에 행복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도 몰입했을 때 보이는 모습은 비슷하다. 집단 속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아왔던 유지해왔던 인간의 특성상 답을 찾기 위해 어떤 구조에 속하고 몰입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몰입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조건이라 할 때, 몰입이 문제가 되는 건 몰입하는 행위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몰입은 분명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무엇에 몰입하는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몰입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속에서 이뤄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몰입에 앞서 그 배경이 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통찰도 중요하겠다.
성별과 세대 갈라치기, 좌우 논쟁과 분열의 시대이다. 인정과 존중의 욕구는 차고 넘치지만 서로에게 정답을 강요하며 해답을 찾지는 않는다. 인간은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느낀점은 특정 종교집단의 옳고 그름보다는 시대가, 사회가 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생각하고 삶을 주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경쟁과 비교에 노출된 시대이다. 자산과 교육과 문화뿐만 아니라 시간조차도 화폐가치로 교환하는 시대이다. 다수가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는 극과 극에 맞닿아 있는 시스템에 자신을 밀어넣고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만든다.
올해 성북구에서 주최한 사회복지 종사자 인권 교육을 들었다. 기억에 남는 말은 옛날 계몽 포스터의 문구에 대한 해석이었다. 학급 공용물품에 대한 것이었는데 "내 물건처럼 아껴 쓰자"는 문구를 접한 외국 사람의 반응이었다. 내 물건인데 아껴 쓰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외국이라면 "남의 물건처럼 아껴 쓰자"고 했을 거란다. 이타심의 기준이 '나'가 아니라 '남'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 기준의 차이를 느꼈다. 어느 집단이든, 진보든 보수든, 이단이든 정통이든 자기 삶이 기준은 스스로 세워야 하지만 맞닿아 있는 타자의 삶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신천지와 같은 종교집단, 극우와 극좌의 집단적 사고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남을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 시스템의 주장은 자신과 동일시 되고 그 이해를, 이익을 관철시키는 존재로 인간을 구속시킨다. 결국 나도 없고 남도 없게 만든다.
이타심의 기준은 ‘남’이다. ‘남을 생각하는 나’가 있어야지만 ‘나’의 인권도 존중받는다. 몰입은 분명, 인간의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몰입에 앞서 사회적 배경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몰입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몰입의 대상은 사회적 맥락과 타인을 배려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특정 종교집단이나 극우와 극좌의 극단적 집단사고는 개인의 삶을 좁히고 사회적 타자의 존재를 무시하게 만든다. 이타심을 전제로 한 몰입이 필요한 사회이다. 대립과 분열의 시대이기에 ‘남의 물건처럼 아껴쓰자’는 말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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