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讀)한 사람들! By 전광석
- 2025-03-30
- 224
- 0
- 0
앙상한 가지에 새순이 돋더니 어느새 온 세상이 연둣빛으로 물든 계절입니다.
생명의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봄입니다. 봄꽃, 봄나물, 봄바람, 봄비, 봄 나들이…
봄나물 캐는 산골 소녀 감성을 지닌 김신지 작가가 《계절 행복》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24절기 소소한 행복을 전합니다.
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건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일.
이 햇빛에, 이 바람 아래, 무얼 하면 좋을지, 비오는 날과 눈 내리는 날 어디에 있고 싶은지 생각하며 사는 것. 그러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보였다. 좋아하는 것들 앞에 '제철'을 붙이자 사는 일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제철 산책, 제철 낭만, 제철 여행, 제철 취미, 제철 만남, 제철 선물, 제철 휴식, 제철 풍경…
풍류란 한자 그대로,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람의 흐름을 느낄 줄 아는 것일 텐데 다산과 그의 벗들은 풍류를 구체적인 삶으로 살아낸 사람들이었으리라.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의 규약은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풍류를 즐긴 흔적이다. 우리의 모임 규약에도 풍류를 담아볼까?
ㆍ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ㆍ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ㆍ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ㆍ가을이 되면 서쪽 연못에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ㆍ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ㆍ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ㆍ세모(歲暮)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 마시며 시 읊는데에 이바지 한다.
춘분에는 산책을!
3월 중순에 접어들면 익숙한 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니, 왔던 만큼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게 산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무렵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늘 시인의 마음.
'사랑하는 친구야, 오늘은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가자. 발이 아프단 핑계를 대며 돌아오는 사람이 되지는 않게.'
봄이 갑작스럽게 오는 것저럼 느껴진다면 그건 봄을 지켜보지 않아서일지도. 걷는 사람은 어떤 봄도 갑자기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입하엔 '솔라르프리'
이맘때 숲이나 강을 걷다 보면 이 모든 것을 누리는데 시간만 있으면 될 뿐 아무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공기는 폭신하고 햇살은 따스하며 풍경에선 윤기가 난다. 누구도 가질 수 없기에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자연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아이슬란드에는 '날씨가 화창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예정에 없이 주어지는 휴가'를 뜻하는 '솔라르프리'라는 단어가 있다. 번역하면 태양 휴일 혹은 날씨 휴가쯤 될까. 비바람이 걷히고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를 누구보다 기다릴 사람들. 드물고 소중한 것이 찾아오면, 누릴 수 있을 때 마땅히 누려두려는 마음이 만들어낸 문화가 아닐지.
대서엔 휴식의 자세가 제철!
열두 번째 절기이자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는 큰 더위라는 이름 그대로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때를 가리킨다. 옛사람들은 이 더위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이겨내려 하지 않았던 게 조상들의 지혜다. 여름은 여름답게 덥고, 겨울은 겨울답게 추운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때를 기다렸던 조상들은 삼복을 쉬어가는 날로 삼았다. 초복, 중복, 말복은 긴 여름을 지나는 동안 멈추었다가는 세 번의 간이역인 셈이다.
나의 풍류 선배 다산이 쓴 글 중에 <소서팔사> 즉, 더위를 식히는 여덟 가지 방법에 대한 글이 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읽다 보면 땀이 식으며 한 줄기 바람이 스치는 기분이다.
송단호시 - 소나무 숲에서 활쏘기
괴음추천 - 느티나무아래에서 그네타기
청점혁기 -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동림청선 - 동쪽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우일사운 - 비 오는 날 시 짓기
월야탁족 - 달밤에 개울가에 발 담그기
처서엔 포쇄가 제철!
처서는 저무는 여름과 시간을 들여 인사하고 천천히 작별하는 과정이다.
처서의 풍습에 장마가 있는 여름을 지나는 동안 눅눅해진 책이나 옷을 모두 꺼내어 햇볕에 쬐고 바람에 말리던 포쇄가 있다. 주로 1년 중 햇볕이 가장 좋은 시기에 정기적인 포쇄를 했다.
포쇄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 중 하나는 송나라 유의경이 편집한 <세설신어>에 나온다.
'한낮에 해를 보고 누웠기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배 속의 책을 말리고 있소'
배 속의 책을 말려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눅눅했을까. 초가을이라 부르기엔 아직 이른 8월, 여름과 천천히 작별하고 있다.
한로 - 가을을 즐기기 좋은 때!
영근 과일을 따고 곡식을 거두어들이느라 분주한 지금은 열일곱 번째 절기인 한로. 밤 기온이 점점 떨어지며 이슬이 서리로 변하기 직전, 이름 그대로 '찬 이슬'이 맺히는 때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정석주, < 대추 한 알>
국화꽃이 피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한로는, 예로부터 산에 올라 가을날을 즐기기 좋은 때였다. 삼짇날(음력3월 3일)에 푸르게 돋은 풀을 밟으면 산책하는 답청을 했다면 중양절(음력9월 9일)엔 등고를 했다. 가까운 사람들과 높은 곳에 올라서 하루를 즐기던 풍속이다.
지금도 10월에 단풍놀이를 떠나는 건 이런 풍속을 이어온 흔적이지 않을까.
입동엔 까치밥 닮은 선물이 제철!
절기로부터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입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아무래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겨울을 건널 준비를 하라는 말 같다. 까치밥도, 치계미(경로잔치)도 모두 앞으로 닥쳐올 추위에 대비해 주변을 돌보던 마음씨. 그래서 입동 이후로는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기를 생각하며 틈틈이 연말 선물을 사 모은다.
예로부터 '하선동력'이라해서 '여름 부채, 겨울 달력', 즉 철에 맞는 선물을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풍속이다.
김신지 작가의 글은 우리의 바쁜 현대적 일상 속에서도 계절의 흐름에 따라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전달합니다.
자연과 함께하며 계절을 깊이 음미하고, 삶에 '제철'의 기쁨을 더해가는 묘사들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그중에서도 다산 정약용의 풍류와 지혜가 담긴 규약과 글들은, 단순한 생활의 방식이 아니라 위트와 풍류가 담겨 있습니다.
계절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누리려는 이 감성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쩌면 더더욱 큰 위로와 재충전의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문득, 요즘의 계절이나 일상 속에서 여러분만의 '제철'을 어떻게 느끼며 누리고 있는지 사뭇 궁금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른 당신만의 계절 행복이나 풍경이 있는지 여쭙게 됩니다.
댓글
댓글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