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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신청주의도 잔인합니다만...

  • 신청주의
  • 선별주의
  • 잔여주의

"신청주의는 매우 잔인한 제도가 아닌가“, 

"신청을 안 했다고 안 주니까 지원을 못 받아서 (사람이) 죽고 그러는 것", 

"정보화 사회라서 다 알고 있는데, 쫙 지급하고 안 받겠다는 사람은 반납하면 되는데 왜 굳이 신청하게 해서 행정력을 낭비하느냐


 

얼마 전 재정 관련 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 이야기이다. 복지사각지대 문제 원인을 신청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편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신청주의란, 당사자가 신청해야 권리가 성립하거나 절차가 개시되는 원리이다. 이는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법 격언과 같이 모든 복지는 신청이 필요하다는 복지서비스 수급의 전제조건이었다.

 

신청주의가 갖는 폐해는 그동안 사회복지현장에서도 꾸준히 제기해온 문제이다. 취약계층일수록 복잡한 증빙, 반복되는 행정 방문, 디지털 접근성 부족, 낙인과 두려움으로 접근의 어려움이 있다. 신청주의는 제도가 존재함에도 이용할 수 없게 만드는 장벽이었다. 기초생활수급신청이나 무상급식의 공휴일 중식비 지원 신청, 정보접근성이 낮은 독거 어르신 은둔 청년 불안정 노동자 등은 신청의 문턱조차 다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산재보험은 현장에서의 공상처리(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를 입었을 때, 산재보험 처리를 하지 않고 사업주가 직접 보상하는 것) 압박이나 고용불안으로 신청조차 어렵다.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편급여에 자동급여 방식을 도입해왔다. 출생과 동시에 양육 급여와 지원이 시작되고 연금수급 연령이 되면 별도의 신청이 없어도 계좌에 입금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했듯 자동지급은 오히려 행정 비용을 효율화시킨다. 미수급을 줄이는 일이 부정수급을 통제하는 것보다 행정효율성이 높고 비용도 줄일 수 있다. 자동지급은 권리로서의 복지와 재정 절약이라는 이중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오랫동안 폐지·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된 신청주의가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일면 허탈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변화의 단초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우리사회가 복지 사각지대의 문제를 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현실적 상황이기도 하다. 어쩌면 송파 세모녀도, 망우동 모녀도, 관악구 탈북 모자와 방배동 김씨, 신촌 모녀와 같은 호모사케르의 희생이 구조를 바꾸는 사회적 제의(祭儀) 역할을 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청주의의 자동지급 전환에서 정작 고려해야 할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다. 신청주의는 신청하면 수급자가 될수 있는데 미신청한 경우(미신청, 거부오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강점이 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데 신청해도 이미 제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사람들은 자동지급이 되더라도 혜택을 받지는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부양의무자 제도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에는 부양의무자 제도 폐지가 있었지만 세부계획에서는 완화로 조정되었다. 제도적 개선 없이 신청주의가 폐지된다고 해도 기대할 수 있는 변화는 많지 않다. 신청주의와 함께 혁신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제도는 강한 선별주의이다. 대통령의 언급처럼 신청주의는 잔인한 것이다. 그러나 더 잔인한 것은 강한 선별주의이다. 신청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선별주의가 온존하는 이상 문제해결의 여지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신청주의를 폐지했다면 부양의무자 제도도 폐지되어야 한다. 신청주의가 폐지된다고 해도 선별주의에 대한 제도적 개선이 없으면 현실 속 사각지대는 여전히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국세청, 지자체, 건강보험공단 등 공공데이터 등 공적 정보와 실제 생활 사이의 격차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복지사각지대는 신청을 못해서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가족의 재산을 실제 소득과 관련 없음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신청주의 폐지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폐해(弊害)들이 해결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단초를 제공한다는 의미는 자동지급이 복지사각지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복지서비스가 충분하지 않고(형식만 있고 내용은 빈약하고) 강한 선별주의로 신청주의 폐지의 대상에 조차 포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자동지급이 된다 한들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신청주의의 폐지가 선별주의의 약화로, 보편복지의 확대로 이어지는 경로가 되기 위해서는 단계적 전환이 필요하다.

 

또 한편으로는 신청주의가 자동지급으로 단계적 전환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모든 사회보장서비스에 있어 신청주의는 완전히 폐지될 수는 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신청주의가 아닌 인간에 대한 심사가 공적데이터를 통해 이뤄질 텐데 자동화가 가속될수록 수급 선정 또는 사회보장서비스의 기계적 선별은 더욱 가속될 가능성이 높다.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활동가의 글로 칼럼을 마무리 한다.

가난한 이들의 곁에 있는 중립적 길잡이다. 복잡한 현실과 어긋나는 복지제도 사이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부정수급이 아니냐는 의심보다 어떤 제도가 지금 필요한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절실하다.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의 역할이다) 어떤 자동화보다 더 낫고, 필요한 일이다.”


한가지 더 덧붙임.(2017년 8월 17일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페이스북에 올라왔던 공동선언문)


[공동선언문]
폐지아닌 완화로는 사각지대해소 어림없다!
빈곤문제 1호 과제 부양의무자기준 완전폐지하라!
지난 8월10일, 정부는 제1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이하: 1차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그 내용에는 빈곤사각지대 해소를 목표로 부양의무자기준 단계적폐지를 담고있다. 하지만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부양의무자기준 완화계획일 뿐, 단계적폐지 계획은 찾아볼 수 없다. 주거급여에서만 폐지를 계획했고 수급(권)자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필수적인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는 폐지아닌 완화계획만을 발표했다.
부양의무자기준 완전폐지 없이는 사각지대 개선효과 없다!
후보시절 문재인대통령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선언 앞에 가난한 이들은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당선 유력후보의 약속으로 당장은 아니라도 앞으로의 조금 더 나은 삶, 가뭄에 단비를 기대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차 종합계획의 발표는 가난한 이들의 기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기대했던 단비 아닌 쓴비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더 깊게 할퀴었다. 부양의무자기준은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이래 계속해서 완화되어왔다. 하지만 사각지대 역시 계속 방치되어왔다. 1차 종합계획의 내용대로라면 2012년 사위의 소득증가로 시청 앞 음독자살했던 거제의 이씨할머니는 10년이 지난 2022년에 조차 다른 선택의 방도 없이 같은 절망에 마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저들의 인권과 권익을 지키며,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고,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앞세운다!
사회복지사 선서 내용의 일부이다. 지난 대선기간 사회복지계는 한국사회 심각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제도개선의 우선과제로 꼽았다. 부양의무자기준이라는 구시대적 불의와 부정을 거부하고, 가난한 이들의 인권과 권익을 지키겠다는 공동의 다짐이었다. 문재인대통령이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약속했을 때 사회복지인들은 환호했다. 눈앞에 보이는 사각지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수급권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1차 종합계획은 사회복지인들의 다짐을 우롱했다. 사회복지현장은 이전과 다르지 않게 부양의무자기준이라는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거치며 연락이 안 되는 부양의무자, 실제 부양받을 수 없는 부양의무자들로 인해 제도에서 내몰리는 사각지대와 마주하게 될 것이며, 사회복지인들에게 회의감과 자괴감을 안겨 줄 것이다.
폐지아닌 완화로는 사각지대해소 어림없다! 문재인대통령은 약속을 이행하라!
부양의무자기준의 완전한 폐지는 빈곤해결을 위한 시급한 과제이며 복지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한 중대한 과제이다. 이에 우리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회복지인으로서 1차 종합계획의 꼼수 가득한 부양의무자기준 완화계획에 분노하며, 대통령의 공약대로 모든급여에서 단계적폐지 약속이행을 강력히 촉구한다.
다시 한 번 밝힌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아닌 완화로는 사각지대해소 어림없다. 문재인정부가 보여주기식 복지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빈곤해결에 진정 의지가 있다면, 대통령의 공약대로 부양의무자기준의 완전폐지를 위한 단계적폐지 계획을 단기 내 수립해야 한다.
2017년 8월17일
부양의무자기준 완전폐지를 위한 범사회복지계 공동선언 참가자 일동



참고

https://www.facebook.com/yoonyoonyoungyoung

https://blog.naver.com/gombuy1/223974146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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