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밖복지 By 노수현
- 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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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용어의 변화가 시급합니다. 생각이 언어로 표현되듯이, 언어가 곧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행정 용어는 개조식으로 뜻을 함축해서 표현합니다. 추상적이고 당위적입니다. 증진, 제고, 향상, 형성, 구축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표현을 많이 쓰면 안전합니다. 웬만한 문제는 모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구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세밀한 변화를 이끌기 어려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해 보세요.
“친구야, 우리 오랜만에 관계를 증진하자!”
바로 전화를 끊지 않을까요? 심지어 이런 말을 덧붙인다면요.
“관계 증진을 통하여 우정의 지속적인 기반 구축 및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자!”
전화 통화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친구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쓴 책은 사전 정보 없는 중학생이 읽어도 이해되는 책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쓰면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반대입니다. 쉬운 설명, 편한 전달력에 반응하는 시대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보다는 ‘우리 사이’가 적합한 표현입니다. ‘증진’보다는 ‘가까워진다’가 어울리는 말입니다. ‘관계 증진’보다 ‘가까운 사이’ 또는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말해야 편하게 전달됩니다.
주민을 만나려면 생활 용어를 써야 합니다. 물론 보고서와 말이 같지는 않습니다. 구어체와 문어체는 다르니까요. 그러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구어체와 문어체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사회복지 현장 아직도 너무 멉니다. 탄핵 심판 선고 결정문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력에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해서 그렇고, 원래 글은 그래야 합니다. 글은 정보 저장과 소통의 수단이니까요.
말과 글이 가장 멀게 느껴지는 대표적인 예는 법조문입니다. 분명 한글인데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와 문장이 이어집니다. 그런 법조문마저도 쉬운 언어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더 늦출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하는 사회복지 실천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안합니다. 개조식 함축어는 되도록 풀어 쓰도록 합시다.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함’보다는 ‘앞으로 3개월 동안 주 1회 연락드리고, 월 1회 만납니다.’라고 풀어쓰면 이해도 쉽고 무엇보다 실천의 의지와 계획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개조식 함축어를 피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거대 언어 모델입니다. 생각을 세밀하게 풀어내야 인공지능을 활용한 요약, 편집, 기획, 변환이 수월합니다. 과거에는 이야기체로 풀어쓰면 보고용으로 다시 요약하고 편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보고용 개조식으로 쓰던 습관이 이제 관행이자 규칙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요약, 편집을 대신해 줍니다. 충분한 내용이 있다면 나머지는 유능한 직원에게 맡기듯이 인공지능에 넘기면 됩니다. 생각 없이 백지부터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건 지양해야 하지만, 내용이 있다면 충분히 활용해야 합니다.
앞으로 기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우선 이것부터 실천해 봅시다. 내 생각을 쉽게 풀어쓰기! 모든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삶은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자서전을 쓰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가족과 친구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로 이겁니다. 함축된 개조식으로 쓰는 건 어색하지만, 이야기체로 풀어 쓰는 건 익숙한 일입니다. 우선 여기까지만 해보세요. 이것만으로도 기록이 달라집니다. 생각을 풀어쓰는 건 기록의 기초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실력이 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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