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관 사회사업 By 김세진
-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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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일
: 최재천 교수의 디지스트 축사에서 건진 사회사업 실마리
"이 나라에서는 이상하게 연구업적을 너무 단순히 '논문 수'와 '인용도'로만 평가합니다."
최재천 교수의 디지스트 ( D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졸업식 축사 영상(2025.10.9.)을 보았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축사에서 와닿은 말씀은 '기존의 공식은 다 버리라'였습니다.
어떤 과학 분야는 연구 결과 하나를 얻는 데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연구는 당장 성과는 보여줄 수 없으니, 지원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연구하려는 연구자도 많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지원과 육성) 공식은, 결국 과학계 전체를 무너지게 한다는 겁니다.
“숫자로만 평가되는 성과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
그 말씀은 과학계를 향한 조언이었지만, 곧바로 사회사업 현장을 떠올렸습니다.
숫자로만 평가받는 구조는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 화면 갈무리
지금 사회복지 현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사업을 끝낼 때마다 보고서에는 숫자와 그래프가 가득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몇 명이 참여했고, 몇 건을 진행했으며, 만족도는 몇 퍼센트였는가.
성과로 나타내는 건 늘 이런 숫자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사업에는 숫자로는 보이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여는 시간, 서로 안부를 묻는 주민 사이 미묘한 변화,
처음으로 당신 이야기를 꺼낸 당사자의 용기, 그 가운데 감탄 감사 감동한 사회사업가의 성장.
이런 일은 눈앞에서 바로 드러나는 성과가 아닙니다.
얼마간의 시간과 관계를 거쳐야만 맛볼 수 있는 수확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과보고서에 담기 쉽지 않습니다.
수치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장의 압력도 문제입니다.
기관은 실적을 요구하고, 행정은 결과를 묻습니다.
이런 구조 아래에서 ‘당장 효과가 있는 일’, ‘숫자로 보여줄 수 있는 일’에만 관심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의미를 찾기 위해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일, 성과가 불분명한 일, 실패로 보일 수 있는 일은 미뤄둡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이런 것들을 '이상적'이라고 말하며 상상조차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사업은 언젠가부터 ‘삶을 돕는 일’이 아니라 ‘성과를 만드는 일’로 변해갑니다.
사회사업은 본래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회사업 바탕인) 공감조차 '비전문적'으로 여겨지고, 마음을 쓰는 일을 '비효율'로 부르곤 합니다.
성과가 나올 만한 사람만을 골라 지원하고, 효율이 나올 만한 프로그램만을 유지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 변화가 더딘 사람, 외롭고 고립된 사람은 점점 숫자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이제는 그 공식을 버리라'는 말이 요즘 더욱 절실하게 와닿습니다.
사회사업이란 '사람과 시간과 관계의 일'입니다.
변화가 더디고, 어떤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의 회복, 시간 속에서 조금씩 움트는 당사자의 변화,
한 방향에서는 알 수 없는 지역사회의 움직임.
이런 바탕 위에서 비로소 사회사업이 '생동'합니다.
(숫자로 나타나는) 성과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성과는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돕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합니다.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일, 오래 걸리는 일,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일에 주목하는 것.
그 일이야말로 사회사업의 본령이고,
사람을 돕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숫자를 모두 거부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일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다음 사람이 참고할 수 있도록 정리할 것인가를 궁리합니다.
(* 마침, 우수명 교수님이 다음 주 이런 의미를 좇는 성과 평가 방식을 논의하러 책방에 오십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기대하는 마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더욱 사회사업가는 ‘보이지 않는 일’을 기록합니다.
그 기록은 성과가 아니라 관계의 흔적입니다.
결과보고이기도 하지만 ‘삶의 서사’입니다.
이런 기록은 숫자 대신 이야기를 남기고, 성과 대신 과정을 보여주며, 결과 대신 관계를 증언합니다.
최재천 교수가 말한 '기존의 공식'은 사회사업에서도 다시 써야 할 말입니다.
효율과 함께 관계를 생각하고, 속도만큼 시간을 쌓아가고, 숫자에 가려진 사람을 보는 새로운 공식.
이 공식을 따르는 사회사업가는 당장은 눈에 띄지 않아도 오래 남는 변화를 만듭니다.
낡은 공식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공식을 준비합니다.
그 공식은 결국 사회사업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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