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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_<이반 일리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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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작자정신, 2011)




죽음에 이르고서야 보이는 진실한 관계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쓴 이 소설은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사건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촉망받는 판사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철저히 중산층의 가치관을 따르며 품위 있고 안락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면서 그의 견고했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오자 그가 평생 공들여 쌓아온 지위, 재산, 관계들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소외감 속에서 그는 둘레 사람들의 위선과 마주합니다.

반면, 하인 게라심의 진심 어린 돌봄을 통해서야 비로소 참된 인간애를 발견합니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심리적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존엄한 죽음’과 ‘진실한 관계’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서비스 지원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이유

판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병을 얻고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그는 분명 화려한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실존적 관점에서 보자면 삶의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쌓아 올린 높은 지위와 안정적 수입, 안락한 집과 번듯한 가족은

죽음이라는 근원적 위기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은 사회사업 현장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당사자에게 제공하는 물질적 지원과 제도적 서비스가 과연 한 사람의 삶을 완전하게 지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경제적 결핍을 채우는 일은 생존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삶의 벼랑에 서게 될 때, 그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붙잡아줄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유독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당신의 고통은 의미가 있고, 당신은 끝까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해주는 이가 곁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공허함은 물질이나 시스템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항상 똑같았던 삶. 계속되면 될수록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그만큼 내 발아래에서 삶은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온 삶을 통해 갈구한 ‘그 한 사람’


임종의 순간, 이반 일리치가 가장 간절히 원했던 건 판사라는 역할에 걸맞은 존경이나 체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가련하게 여기고, 어루만져 주며, 함께 울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은 그 소망마저 스스로 억누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시 ‘엄숙한 판사’의 얼굴을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통을 감춥니다.


여기서 사회사업의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당사자가 보여주는 침착함과 체념, 혹은 괜찮은 척하는 태도는 종종 삶에 적응한 모습이 아니라,

어떤 간절함을 숨긴 사회적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는 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마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버티고 있는 신호를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하인 게라심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게라심은 일리치의 고통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했습니다.

무거운 다리를 자기 어깨 위에 기꺼이 올림으로써 고통의 무게를 분담했습니다.

일리치를 ‘환자’나 ‘판사’가 아니라, 고통 속에 놓인 한 사람으로 대하며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 이반 일리치는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당사자를 ‘사례(Case)’가 아닌 아픔 속에 놓인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라심의 환대야말로

사회사업가가 서야 할 자리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가장 심한 고통을 느꼈던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처럼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린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는 고백하는 게 지독히 창피했지만

누군가 자기를 병든 어린애처럼 불쌍히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는 누군가 살살 어린애를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져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길 원했다.

그는 자신이 요직에 있고 수염이 하얗게 세는 나이이기 때문에 그런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대접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게라심과의 관계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반 일리치는 울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직장동료인 세벡 판사가 찾아오자 눈물과 토닥거림에 대한 소망을 감추고

대신 진지하고 엄숙하며 깊이 사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타성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그 자신과 그 주위의 거짓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망쳤다.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정상성’의 경계


이반 일리치의 고통은 죽음 자체보다, 병든 자신이 더는 ‘정상적인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실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평생 정상성의 중심에서 타인을 심판해온 그였지만,

의존이 시작되는 순간 사회적 주변부로 밀려나 ‘돌봄을 받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사업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기능이 약해진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물고 다시 연결하는 일이 우리 역할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생의 끝자락에서 사회사업 ‘대상’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를 괴롭힌 건 대상화가 주는 모멸감이었습니다.

이를 치유하는 힘은 의존을 부끄러움이 아닌 ‘서로 기댐’으로 재정의하는 인격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관계의 붕괴와 회복


이반 일리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육체적 통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견뎌줄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지증(치매)을 겪는 어르신들의 경험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질병의 증상보다 더 잔인한 것은, 누구도 더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렇게 점차 관계에서 밀려난다는 느낌입니다.


전희식 작가의 『똥꽃』에서처럼, 가족조차 어머니를 ‘환자’로만 대하며 말을 흘려듣기 시작할 때 존재의 상실은 가속화됩니다.

병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관계의 붕괴가 삶을 먼저 지워버립니다.

사회사업가는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병 때문에 깨진 관계를 다시 생동하는 사람입니다.

치매나 장애가 있어도 여전히 ‘어머니’로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사회사업의 본질입니다.



고립, 연결만 되면 되는 걸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립사(고독사)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 서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온갖 사람을 조직하고,

다양한 정보기술(IT) 기기를 도입하고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는 등 ‘연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립을 막을 수 있는가?’


일리치는 가족과 동료라는 촘촘한 관계망 속에 있었지만,

그 누구와도 정직한 마음을 나누지 못해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기계적인 안부 확인이나 서비스의 투입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반 일리치가 게라심에게서 얻었던 위안처럼,

자기 고통을 조금은 드러내도 괜찮은 ‘정직하고 인격적인 만남’도 궁리합니다.


고립 지원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단지 사회적 관계망의 ‘숫자’를 늘리는 일뿐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당사자와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질적 만남이 필요합니다.



태도가 곧 전문성


이반 일리치는 병원에서 의사를 만난 뒤, 과거 자신이 법정에서 피고들을 대했던 태도를 떠올립니다.

자기 생사가 걸린 절박한 문제를 기계적인 절차와 서류로만 처리하는 전문가 앞에서 그는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사회사업가 또한 ‘전문성’이라는 이름 아래, 당사자의 고통을 서류와 숫자로만 정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어쩌면 진정한 전문성은 세련된 기술 이전에 상대의 절박함을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친형을 지켜보며 느낀 무기력함과,

어느 판사의 죽음을 실제로 지켜보며 이 소설을 집필했습니다.

작가가 목격한 ‘죽음 곁의 고독’은 오늘날 우리가 현장에서 만나는 당사자들의 고독과 닮아 있습니다.



삶의 갈무리를 거드는 동반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당신의 마지막 곁을 지킬 것이며, 당신은 지금 누구의 곁을 지키고 있는가.

사회사업가는 화려한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고 가장 연약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

그 두려움을 혼자 견디지 않도록 손을 맞잡아 주는 사람입니다.

물질과 서비스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빈자리를 진심 어린 환대와 인격적 관계로 채워주는 동반자,

사회사업은 그런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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