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관 사회사업 By 김세진
- 202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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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 존엄을 지키는 예술
<변신> (카프카)
가족과 사회 속에서 역할 상실을 마주한 주인공
어느 날 아침, 평범한 외판원이었던 그레고르 잠자는 침대 위에서 자신이 흉측한 거대 갑충(벌레)으로 변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레고르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신체적 변화보다 ‘지각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당하면 어쩌나’, ‘가족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나’를 먼저 걱정합니다.
그레고르의 변화를 알게 된 가족의 반응은 조금씩 변해 갑니다. 처음에는 공포와 혐오를 느끼며 그를 방 안에 가둡니다. 의무적으로 돌봐가던 가족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누이동생 그레테가 음식물 쓰레기를 넣어주며 그를 돌보지만,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그레고르는 점차 가족에게 ‘짐’으로 여겨집니다.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그레고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레고르의 수입에만 의존했던 가족이 이제 생계를 위해 각자 일을 시작하며 활기를 찾을수록,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철저히 잊혀집니다. 결국 가장 아끼던 동생마저 ‘저것을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레고르는 식사를 거부하고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내면화된 무가치감의 결과임은 분명합니다. 일벌레에서 벗어났으나 결국 ‘무용한 존재’로 낙인찍혀 사라지는, 출구 없는 비극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가족은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고 밝은 미래를 꿈꾸며 소풍을 떠나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레고르 잠자를 보며 떠오른 인지증 어르신
그레고르는 가족의 유일한 경제적 기둥이자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벌레가 되는 순간, 그는 가족을 부양하는 ‘기능’을 상실합니다. 이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인지증(치매)이라는 질병 앞에 사회적·경제적 역할을 박탈당하는 우리 시대 어르신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자본주의 가치가 지배하는 가정 안에서, 생산성을 상실한 인간은 더는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관리해야 할 대상’ 혹은 ‘치워야 할 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변신』의 유일한 해석이 아닙니다. 사회사업가로서 경험한 일들 속에서 선명하게 겹쳐 보이는 장면일 뿐입니다. 책 속에서 건져 올리는 건 각자의 몫입니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벽과 천장을 타고 다니며 끈적한 점액의 흔적을 남깁니다. 가족은 이를 불결하게 여기며 혐오하지만, 사회사업적 시선에서는 언어를 잃어버린 자의 처절한 소통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인지증 어르신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벽에 배설물을 묻히기도 하는데, 그레고르의 모습은 소위 ‘똥꽃’을 피우는 행위와 닮아있습니다.
가족에게 그것은 청소해야 할 오물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어르신에게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비언어적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레고르가 자기 방에서 물건이 치워지는 일에 저항하며 벽지에 몸을 붙였던 것처럼, 어르신들 또한 한평생 쌓아온 자기 세계가 해체되는 상황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르의 죽음은 ‘식사 거부’에 의한 신체적 죽음 이전에, 가족이 그레고르를 ‘그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사회적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지증 어르신 역시 확진을 받는 순간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사회적 죽음’을 먼저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치매로 말미암은 고통보다 망상과 환각에 대한 가족과 이웃의 냉대와 비웃음이 어머니를 좌절하게 합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몰아세웁니다. 가족조차 어머니 말씀을 치매에 걸렸다며 귀담아듣지 않고 건성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어머니 또한 누구 말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자기 존재의 상실은 어머니 증세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가족에게조차 외면받는 관계와 신뢰가 사라진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삶을 포기하게 할 겁니다. 존재와 역할이 있는 자기 삶을 내려놓았으니 이제 나쁜 증상은 더욱 반복되고 그 정도도 깊어집니다.
(…) 생각해보면 치매보다 치매로 왜곡되고 깨어지는 관계가 무섭습니다. 죽음보다 평생 쌓아 올린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죽어가는 과정이 두렵습니다.
<사회복지사의 독서노트> (김세진, 구슬꿰는실, 2020)
가족 돌봄의 한계와 잔혹한 양가감정
존재는 그대로인데 외형이 달라지거나 기능을 상실하였을 때, 둘레 사람이 그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집니다. 적어도 사회사업에서는 그 모습이 어떠하든, 시종일관 인격적 존재로 마주합니다.
처음에는 연민으로 오빠를 돌보던 동생 그레테가 결국 ‘저것을 내보내야 한다’며 절규하는 과정은 돌봄 소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 사회적 지지 체계가 부재한 폐쇄된 공간에서 돌봄은 사랑을 증오로 바꿔놓습니다.
그레고르의 죽음 직후, 가족은 슬픔보다 해방감을 느끼며 소풍을 떠나는 장면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잔혹합니다. 이는 오랜 병수발 끝에 부모를 보낸 가족이 느끼는 죄책감 섞인 안도감, 그 미묘한 양가감정을 보여줍니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인지증 어르신이 생겼을 때, 우리는 당사자의 괴로움과 막막함을 공감하기에 앞서 ‘누가 수발을 들 것인가’, ‘시설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같은 기능적 문제를 우선시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위기(그레고르 잠자의 변신) 앞에 체계의 유지(남은 가족 건사)를 먼저 따질 수밖에 없는 비정한 현실을 무미건조하게 보여줍니다.
이 소설에서 악역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려 애쓰고, 어머니는 아들을 가엽게 여기며, 여동생은 헌신적으로 오빠를 돌봅니다. 점차 가족이 그레고르를 방치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때문입니다. 선량했던 가족이 일상의 피로와 공포 속에서 어떻게 서서히 지쳐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는 인지증 어르신을 모시는 가족의 비극과 맞닿아 있습니다. 처음엔 효심으로 시작한 간병이 증오와 방임으로 변하는 과정은 개인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이는 선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돌봄의 구조적 모순’입니다.
닫힌 문을 여는 두 개의 열쇠
그레고르의 방 문이 밖에서 잠겼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스스로 고립된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린 가족과 냉담한 사회에 의해 격리되었습니다.
이 닫힌 문을 열기 위해서는 두 열쇠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정책과 제도로 이뤄진 ‘사회적 지원’입니다. 그레고르 가족이 파멸한 결정적 이유는 돌봄의 책임을 오직 ‘가족’이라는 폐쇄된 체계 안에서만 해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공적 서비스와 경제적 지원 체계는 가족의 소진을 막고 그레고르를 ‘벌레’가 아닌 돌봄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로 머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되어줄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정책과 제도만으로는 그레고르를 ‘생존’하게 할 뿐, 그를 다시 ‘살아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열쇠인 이웃과 인정으로 이뤄진 ‘공동체적 지원’을 등장합니다. 제도와 제도 사이에는 반드시 틈이 존재하며, 그 마른 틈을 메우는 건 결국 둘레 사람의 온기입니다. 그레고르가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 이웃, 직장 동료들이 그의 변신 후에도 여전히 그를 ‘그레고르’로 불러주며 교류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치매에 걸려 언어를 잃고 ‘똥꽃’을 피우더라도, 그것을 혐오가 아닌 질병에 의해 달라진 소통 방식으로 이해해주는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은 제도로는 이룰 수 없는 영역입니다.
사회적 제도가 물리적인 방 문을 연다면, 공동체적 환대는 그레고르를 방 밖으로 이끌어 다시 사람 속에 어울리게 합니다. 정책과 제도가 생명을 보존하는 기술이라면, 이웃과 인정은 존엄을 지키는 예술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란 단순히 복지 예산 증액을 넘어, ‘벌레’로 변해버린 이웃을 향해 기꺼이 평범한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두터운 공동체적 토양을 일구는 일입니다. 그레고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가족의 비난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진실한 위로를 갈구했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속 주인공을 향한 둘레 사람의 다정한 안부였다면, 그의 마지막은 ‘소멸’이 아닌 ‘이별’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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