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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care)’의 사회사업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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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care)’의 사회사업적 번역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사회사업가에게 ‘일방적 간호’와 ‘인간적 돌봄’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가 하인 게라심에게서 느꼈던 위안은 단순한 수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곁을 내어준 공명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Care)’을 흔히 ‘수발’이나 ‘일방적 지원’으로 직역하곤 합니다.

하지만 ‘Care’의 어원인 고대 영어 ‘Cearu(케아루, 슬픔·근심)’와

고대 독일어 ‘Kara(카라, 애도·한탄)’를 살펴보면 그 본질은 사뭇 다릅니다.


Care는 본래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케어한다는 건 당사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를 넘어

상대의 슬픔과 고통에 내 마음을 연결하는 정서적 교류를 의미합니다.


즉, 돌봄은 누군가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고통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 앞에 선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적어도 사회사업에서는 '슬픔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해석함이 옳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돌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를 때, 당사자는 ‘도움만 받는 존재’라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여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일방적 지원은 당사자를 오직 수혜자의 자리에만 머물게 합니다.

그도 같은 인간으로서 누군가에게 기여할 기회를 박탈한 자리에 남는 건 미안함과 무기력함뿐입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위계가 생기는 순간, 돌봄은 인격적 교류가 아닌 ‘업무’나 ‘동정’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회사업이 지향하는 핵심은 ‘상호 돌봄’, 즉 상호의존적 관계입니다.

진정한 돌봄은 도움을 받는 사람 또한 돌봄의 주체가 될 때 완성됩니다.

당사자가 사회사업가에게 삶의 지혜를 나누고, 이웃에게 안부를 묻는 작은 실천이라도 이뤄질 때 돌봄은 ‘순환’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하인 게라심이 이반 일리치를 ‘돌본’ 모습은

그를 ‘죽어가는 환자’가 아닌 ‘고통받는 동료 인간’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관계가 돌봄의 근본입니다.


정책과 제도에서 ‘Care’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든,

적어도 사회사업가는 돌봄 서비스 제공 기술자가 아니라, 상호 돌봄이 가능한 ‘관계’를 만드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당사자가 염치와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대신, 그가 가진 고유의 힘(자연력)으로 타인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

우리다운 ‘돌봄’의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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