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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에서 ‘정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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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에서 ‘정상성’


걸리버는 소인국에서 ‘거인’이었고, 거인국에서는 ‘벌레’ 같았으며, 말이 지배하는 후이넘에서는 ‘짐승(야후)’이라 불렸습니다.

걸리버라는 존재는 변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속한 사회가 설정한 ‘정상성(Normality)’ 기준에 따라

그의 사회적 신분과 대우는 극명하게 달라졌습니다.

이는 사회사업에서 우리가 당사자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가 ‘존엄한 주체’가 될 수도,

‘문제 있는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회사업개론>에서 다루는 ‘규범적 욕구(Normative Need)’는 전문가가 설정한 객관적 기준에 의해 발견되는 욕구입니다.

이 기준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보여줍니다.


첫째, ‘낙인’으로써 정상성.

사회사업가가 가진 정상성의 눈금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편협하면 당사자는 ‘문제 있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후이넘 사회가 이성적 존재를 오직 ‘말’로만 규정한 것처럼,

우리만의 견고한 틀로 당사자를 재단한다면 그는 결코 그 틀을 만족시킬 수 없는 ‘야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지원 근거로써 정상성.

반대로 정상성은 당사자가 여느 사람처럼 지역사회 안에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소인국 사람들이 걸리버에게 1,728인분의 식사를 제공한 일은 그가 가진 거대한 신체적 특성을

객관적으로 계산(사정, assessment)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명확한 기준은 지원(intervention)의 명분이 됩니다.

이는 주먹구구식으로 지원하는 사적 동정을 넘어선 체계적인 공적 지원의 근거입니다.


결국, 사회사업은 이 ‘정상성’이라는 잣대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입니다.

전문가로서 사회사업가는 정상성이라는 명확한 기준을 세웁니다.

객관적인 데이터와 이론을 바탕으로 상황을 분석하는 일은 지원의 전문성을 담보하는 ‘과학(Science)’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을 실제 현장에 적용할 때는 사람과 상황과 사안에 맞게 유연하게 움직입니다.

규정상 지원 대상이 아니더라도 당사자의 고통에 반응하는 ‘직관’이나,

객관적 자료가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맥락을 읽어내는 ‘공감’ 따위가 결합할 때 ‘예술(Art)’로써 실천이 완성됩니다.


사회사업은 정상성이라는 자를 들고 당사자를 재단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를 활용해 당사자가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찾아내고,

동시에 그 자가 담아내지 못하는 당사자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걸리버를 짐승으로 만든 건 그의 모습이 아니라 후이넘 사회의 경직된 기준이었습니다.

사회사업에서 ‘정상성’이 당사자를 질책하는 도구가 아닌 환대의 도구이기를 바랍니다.

사회사업은 이 둘 사이 균형을 찾아가는 일이기에 전통적으로 우리 일을 ‘과학과 예술의 조화’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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