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장애와 동물, 함께 말할 수 있는가

  • 복지속동물
  • 장애학과동물권

장애인의 날에 다시 묻습니다

장애와 동물, 함께 말할 수 있는가?

 

420, 장애인의 날입니다.

이 날은 장애인의 권리와 존엄을 되새기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누구를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 있는지를 묻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을 조금 더 확장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사회를 넘어, 생명 중심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은 자연스럽게 장애학과 동물권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장애를 동물과 함께 논의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넘어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적장애인의 경우 역사적으로 동물에 비유되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되어 온 경험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논의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장애를 동물과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애와 동물을 동시에 억압해 온 사회의 기준과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다시 말해, ‘누가 인간인가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는가를 묻기 위한 시도입니다.

 

장애학은 장애를 단순히 치료해야 할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애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조에 주목합니다. 계단이 많은 사회에서 휠체어 이용자는 장애인이 되고, 소음 중심의 사회에서는 청각장애인이 불편한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설계된 방식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장애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누구를 정상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인간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동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오랫동안 인간의 기준에서 비정상적인 존재로 위치 지워져 왔습니다. 인간처럼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처럼 사고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는 이유로, 인간처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물은 보호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용과 소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본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장애학이 정상성의 기준을 해체하듯, 동물권 역시 인간 중심의 위계질서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장애학과 동물권은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한 공통 구조가 존재합니다.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존재만을 중심에 두는 정상성 중심의 사회, 기여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존재를 주변으로 밀어내는 생산성 중심의 가치 판단, 그리고 돌봄의 이름으로 통제와 제한이 정당화되는 구조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장애인은 돌봄의 대상으로, 동물은 관리의 대상으로 위치 지워집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사자의 삶과 권리가 충분히 존중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회복지 실천에서 돌봄은 핵심 가치입니다. 그러나 돌봄은 언제든지 통제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선택권이 없는 보호, 자율성이 배제된 지원,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은 결국 대상의 삶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장애학은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며 자기결정권과 주체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동물권 논의 역시 단순한 보호를 넘어 존재의 삶의 조건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장애학과 동물권을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 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다양한 존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차이를 결핍으로 보지 않는 사회, 돌봄이 통제가 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인간 모두에게도 더 나은 삶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한층 더 깊고 낯선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작업이 있습니다.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장애와 동물을 하나의 사유 속에서 연결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장애운동가이자 동물운동가인 수나우라 테일러의 작업이 있습니다.

테일러는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몸을 둘러싼 환경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결과로 이해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단순한 생물학적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와 환경이 축적된 결과로 해석하며, 이 지점에서 이미 정상적인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유는 한 장면에서 급격히 확장됩니다. 어린 시절 마주한,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실린 채 이동하던 동물들의 모습입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에서 소진되어 가던 그 장면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이후 그의 사유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남게 됩니다.

테일러는 이후 이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도달합니다.

동물 산업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는 손상된 몸이 아니라 만들어진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 오늘날 산업적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의 몸은 자연 그대로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생산성에 맞게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재구성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과도한 생산을 위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만들어진 몸, 정상적인 움직임이 어려운 상태로 유지되는 몸,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도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몸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external_image

그림설명: 수나우라 테일러의 저서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의 한국 번역서 표지


이러한 통찰은 곧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테일러는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자연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기준과 체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된 결과일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장애와 동물은 하나의 구조 속에서 다시 읽히게 됩니다.


이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과연 자연의 결과인가, 아니면 특정한 기준이 만들어 낸 결과인가?

이 질문은 장애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장애 역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설정한 기준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장애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동물권 담론 내부에서도 긴장을 드러냅니다. 일부 논의는 고통을 기준으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인지 능력이나 자율성을 기준으로 존재의 가치를 구분합니다. 그 결과 특정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는 상대적으로 덜 가치 있는 존재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 범주에는 일부 장애인 역시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는 종차별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능력 중심의 위계를 강화하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길은 기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준 자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최근 제시되는 주의 기울이기(paying attention)’라는 개념은 타자의 필요와 경험을 그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는 존재를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중심에 두는 접근입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능력이나 기능이 아니라, 그 존재와 맺는 관계와 책임입니다. 이는 사회복지 실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제공하는 돌봄이 과연 지원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통제가 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날은 단순히 장애인의 권리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타자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장애와 동물을 함께 사유하는 것은 불편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기존의 기준을 다시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배제하면서 지금의 정상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어떤 권리도 온전히 확장될 수 없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