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모이는 힘 : 사회복지현장 효과적 주민조직화 지렛대 By 강정모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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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의 문턱에 선 2.5년 차의 분투와 새로운 벽
사회복지관의 문을 열고 들어온 지 어느덧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른 박소통 복지사는 현장 체질이었다. 주민센터의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고, 골목 평상에 앉아 어르신들이 건네는 요구르트를 받아 마시며 주민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는 제법 자신이 붙었다. 행정안전부의 주민자치 활성화 흐름이나 보건복지부의 지역사회 통합돌봄 정책이 강조하는 '주민 주도성'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박 복지사가 땀 흘려 뛰어다닌 만큼 마을 현장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예전 같으면 관공서나 복지관에서 정해준 사업 계획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던 주민들이, 마을 복지 계획을 수립할 때 골목 청소 구역을 정하거나 반찬 나눔 대상자를 발굴하는 일 정도는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툴지만 서로 "먼저 말씀하시라"며 양보하는 모습도 보였고, 작은 안건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다수결로 결정해 내는 성숙함도 싹텄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성공 경험은 지역사회의 구체적이고 첨예한 이해관계가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순간 다른 차원의 벽에 부딪혔다. 가벼운 마을 이벤트나 단발성 나눔 사업과는 다른, 주민들의 현실적 권리와 생존권, 제도적 책임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과제 앞에서는 기존의 양보나 단순 다수결 방식이 그 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의 방치된 폐가를 리모델링하여 독거어르신 급식 지원을 위한 '공공 공유주방'을 설치하려는 안건이 대표적이었다.
취약계층의 생존권을 위해 주방 설치가 시급하다는 복지사와 순수한 열정으로 봉사하겠다는 청년의 목소리는, 내 집 앞 골목에 조리 시설이 들어섬으로써 발생할 소음과 악취, 주차난을 우려하는 주민대표의 반발에 부딪혔다. 여기에 대량 조리 행위가 골목 상권의 매출을 위축시킬까 봐 우려하는 인근 상인회장과, 주민 재산권 보호와 복지 예산 집행 사이에서 감사와 민원을 고심하는 행정 공무원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회의는 매번 회의적이었고, 긴장과 침묵을 오갔다. 2.5년 차 실무자인 박 복지사에게 서로 다른 정당성을 가진 이해관계자들을 조율하는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거대한 중압감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선배의 다이어리에서 찾은 소통의 열쇠, 모자들의 수다
늦은 밤, 불 꺼진 사무실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던 박 복지사에게 팀장인 오실무 선배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오 선배는 박 복지사의 복잡한 현장 일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자신이 수년간 현장에서 축적해 온 낡은 교육 바인더 하나를 펼쳐 보였다. 맨 첫 장에는 '입장 토론, 일명 모자들의 수다(풍선들의 수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박 복지사, 주민 모임에서 토론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주민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에요. 도리어 각자가 대변하는 구체적인 권리와 역할에 너무 충실하기 때문이지요. 주민대표는 주민들의 쾌적한 주거권을 지켜야 하고, 상인은 당장 이번 달 점포 임대료와 생계를 지켜야 하니까요. 각자가 서 있는 입장 안에 갇힌 채 상대방의 말을 들으라고 하니, 그건 경청이 아니라 내 주장을 쏟아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대기 시간에 불과해요. 지금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발을 직접 신어보게 만드는 안전하고 입체적인 소통의 기술이에요. 이 입장 토론 기법을 우리 현장에 맞게 적용해 보면 길이 열릴 겁니다."
오 선배가 건넨 자료는 참여자들에게 서로 다른 색상의 모자나 풍선 교구재를 부여하고, 일정 시간 동안 철저히 그 교구재에 부여된 이해관계자의 정체성에 몰입하여 발언하게 만드는 '역할 전환 기반 숙의 토론 모형'이었다. 내 개인의 본래 생각과 다르더라도 부여된 정체성에 기대어 발언하기 때문에 심리적 방어기제가 낮아지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교구재를 옆 사람에게 넘겨가며 다채로운 관점을 순환 체험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에드워드 드 보노와 관점 전환의 과학적 기반
박 복지사는 현장 적용에 앞서 이 기법의 이론적 배경과 과학적 근거를 면밀히 살폈다. 현장에서 변형하여 활용하는 입장 토론은 인지과학과 창의적 사고 교육의 세계적 권위자인 에드워드 드 보노(Edward de Bono)의 '육색모자 사고법(Six Thinking Hats, 1985)'에 든든한 이론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드 보노는 인간의 뇌가 정보, 감정, 비판, 희망, 창의성, 관리적 요소를 한꺼번에 처리하려 할 때 과부하가 걸려 감정적 대립과 인지적 왜곡에 빠진다고 분석했다. 모자의 색상별로 사고의 초점을 단일화하여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할 때 비로소 다각적이고 생산적인 협력적 탐색이 가능해진다는 원리다.

국내 교육학 및 행정학 분야의 실증 연구에서도 이와 같은 색깔 교구 토의 모형의 효과성은 입증되어 왔다. 고정된 자기 관점에서 벗어나 지정된 색상의 역할을 대변하는 훈련을 거친 집단은, 특정 정책 쟁점의 위험 요인과 긍정적 편익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인지적 복잡성'이 토론 전보다 평균 42% 이상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최종 결정안이 본래 자신의 선호와 다르더라도 의사결정 과정의 공정성을 인정하는 '절차적 정당성 인지 비율'이 80%를 웃돌았다(출처: 한국지방자치학회보, "색깔 지정을 통한 관점 전환 토론 기법이 주민참여예산 갈등 조정에 미치는 영향", 2022).
사회복지와 마을공동체 현장에서는 백색(정보), 적색(감정), 흑색(비판) 등 추상적 인지 모자보다, 마을의 실제 '이해관계자 정체성'으로 치환하여 모자나 풍선에 부여할 때 주민들의 몰입도와 숙의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전문가들의 실천 기록을 확인했다.
해외와 국내 현장에서 길어 올린 역지사지의 증거
이러한 정체성 전환 토론은 해외 지역사회 분쟁 해결 현장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이스트 런던(East London) 커뮤니티 재단의 '공동체 주방 및 자치센터 건립 프로젝트'였다. 당시 저소득층 이민자 밀집 구역에 공공 주방을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원주민들의 치안 악화 민원과 인근 소상공인들의 상권 침해 반발로 2년간 사업이 표류하고 있었다.
재단은 감정의 골을 허물기 위해 드 보노의 모형을 지방 거버넌스에 맞춘 '역할극 액션 랩(Role-Play Action Lab)'을 전격 도입했다. 반대파 원주민에게는 '취약계층 이민자'의 모자를, 골목 상인들에게는 '마을 복지 활동가'의 모자를 씌워 발언하게 했다. 타인의 언어로 고통과 공공의 필요성을 직접 발언해 본 참여자들은 서로의 두려움 뒤에 숨겨진 현실적 무게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조건적인 반대를 철회하고, 상인회가 주방에 친환경 로컬 식자재를 전량 납품하는 '로컬 상생 협약'을 이끌어내며 2년 묵은 갈등을 타결했다(출처: 런던 소통연구소 보고서, London Institute of Communication, 'Alternative Community Dispute Resolution Report', 2019).
박 복지사는 이 연구와 사례들을 복기하며, 갈등 해결의 열쇠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논리가 아니라 타인의 신발을 직접 신어보는 정서적·인지적 체험에 있음을 확신했다.
현장 적용 1: 마을 공유주방 갈등 사례
박 복지사는 마을복지계획 추진단 주민 모임에 오색 풍선과 모자 교구재를 들고 들어갔다. 회의실에는 구청 복지정책팀 공무원, 종합사회복지관장, 주민대표, 골목 상인회장, 청년 봉사자 대표 등 5명의 핵심 당사자가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1라운드는 자신의 원래 역할에서 시작했다. 독거어르신의 결식 위기를 막아야 한다는 복지관과 청년, 집 앞 골목의 환경 악화를 용납할 수 없다는 주민대표, 매출 하락을 두려워하는 상인, 절차적 하자 없는 예산 집행을 고심하는 공무원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맞섰다.
이때 박 복지사는 오 선배에게 전수받은 '신체적 전환 의식'을 적용했다. "주민 여러분, 잠시만 자리에서 일어나 풍선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주십시오. 머리로만 생각을 바꾸려 하면 마음의 벽이 열리지 않습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돌며 구호를 외치겠습니다. '내 편견을 버리자! 관점을 바꾸자!' 딱 세 바퀴만 돌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쩍어하던 주민들이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째에 이르자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폭소를 터뜨렸다. 근엄하던 공무원과 완고하던 주민대표의 굳은 얼굴이 풀렸다.
"자, 이제 손에 든 풍선을 오른쪽 분에게 넘깁니다. 한 클릭 이동합니다!"
주민대표는 '사회복지사' 풍선을, 사회복지사는 '지역 상인' 풍선을, 상인은 '청년 봉사자'를, 청년은 '구청 공무원'을, 공무원은 '주민대표'의 풍선을 받아 들었다. 회의실에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늘 완강하게 반대하던 주민대표였다.
"사회복지사 풍선을 들고 보니 가슴이 쿵 내려앉습니다. 매번 찾아와서 '어르신들 목숨이 달렸다'고 사정하던 복지사님의 심정이 제 가슴에 박히네요. 내 집 앞이 불편하다고만 외쳤는데, 당장 이번 주에 영양실조로 쓰러지실 독거노인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복지사로서 이 한정된 예산과 낡은 폐가를 두고 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하고 눈물이 납니다."
뒤이어 상인의 풍선을 쥔 복지관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인 사장님 풍선을 쥐어보니 제 생각이 참 짧았습니다. '좋은 일 하는데 왜 반대만 할까' 서운해했는데, 자영업자 입장이 되어보니 당장 이번 달 임대료와 식자재비, 자식들 학원비가 걸린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복지라는 명분으로 상인들의 불안을 집단이기주의로 치부했던 점을 깊이 반성합니다."
상인회장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신의 절박함을 복지관장이 자기 언어로 온전하게 대변해 주는 순간, 마음의 방패가 스르륵 내려앉은 것이다. 이어 공무원의 풍선을 든 청년은 법과 예산의 한계 속에서 행정소송과 감사의 위험을 안고 줄타기하는 행정의 고충을 대변했다.
풍선을 두 바퀴 더 회전하며 5가지 입장을 고루 살아낸 주민들은 마침내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도출된 합의안은 놀라웠다. 주민대표는 공유주방을 주말과 저녁에 주민 자치 쉼터 및 방과 후 아이 돌봄 공간으로 공동 개방하는 조건으로 설립에 적극 찬성했다. 복지관은 주방에 들어가는 모든 식자재를 골목 상점에서만 구매하는 '로컬 푸드 구매 쿼터제'를 약속했다. 상인회장은 요식업 점주들이 교대로 위생 점검과 조리 재능기부를 맡겠다고 나섰으며, 공무원은 뒤편 유휴지를 매입해 '민관 공용 주차장'을 설치하는 행정 지원 방안을 확정했다.
현장 적용 2: 필수의료·복지 인프라 배치 갈등 사례
마을 단위 공유주방 갈등을 성공적으로 조율한 박소통 복지사는 더 크고 구조적인 지역사회 갈등 현장으로 보폭을 넓혔다. 저출산 문제에 관련한 우리 지역의 '공공산후조리원 및 어린이병원 등 필수의료·복지 인프라 확충'을 둘러싼 민관 거버넌스 공론장이었다.
해당 안건은 '인구 밀집도가 높은 시내 중심가 설치'와 '소멸 위기에 직면한 읍·면 외곽 지역 우선 안배'라는 두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박 복지사는 이해관계자 5개 그룹을 테이블로 초대하여 입장 토론(모자들의 수다)을 설계했다.
① 시내 중심가 워킹맘: "인구가 밀집하고 교통이 편리한 시내 중심가에 설치해야 더 많은 시민이 신속하게 혜택을 봅니다." (표면적 입장) → 아픈 아이를 안고 타 도시로 헤매지 않고, 위급할 때 10분 이내에 안심하고 찾아갈 전문 병원을 가까이 두고 싶은 불안 해소 욕구.
② 읍·면 지역 주민자치회장: "시내에는 이미 의료 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니 소외된 외곽 읍·면에 안배해야 지역 균형발전이 실현됩니다." (표면적 입장) → 우리 마을이 소멸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의료 권리를 보장받아 젊은 층이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은 절박한 욕구.
③ 보건소 보건행정팀장: "예산 한계, 법적 설치 기준, 무엇보다 '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 전문 의료 인력 확보 가능성'을 종합 검토해야 합니다." (표면적 입장) →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 건물을 짓고도 의사를 구하지 못해 문을 닫는 행정 실패를 방지하고, 이용률을 극대화해 성과를 인정받고 싶은 행정적 안전 욕구.
④ 민간 아동병원장: "공공이 저가로 시장에 개입하거나 무리하게 야간 진료를 강제하면 가뜩이나 소아과 기피로 무너져가는 지역 민간 병의원이 연쇄 도산합니다." (표면적 입장) → 공공의 시장 개입으로 적자를 보지 않도록 경영 안전성을 보장받고, 심각한 의료진 구인난을 행정이 구조적으로 뒷받침해 주길 바라는 생존 욕구.
⑤ 구도심 상인회장: "신도심 개발로 원도심이 완전히 고사했으니, 공공 인프라를 구도심 유휴 부지에 유치하여 활력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표면적 입장) → 신도시로 유출되는 유동 인구를 다시 유입시켜 무너진 골목 상권을 살리고 점포 생계를 지키려는 절박한 욕구.
박 복지사는 5개의 모자를 배분하고 1차 발언 후, 모자를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시켰다.
읍·면 주민자치회장의 모자를 쓰게 된 '시내 중심가 워킹맘'은 외곽 지역 산모들이 산후조리원이나 소아과가 없어 1시간 넘게 굽이진 도로를 달려와야 하는 고통을 말하며 목이 메었다. 반대로 워킹맘의 모자를 쓴 '읍·면 주민자치회장'은 "밤 11시에 아이가 40도 고열로 경련을 일으킬 때 차를 몰고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하는 젊은 엄마들의 타는 가슴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의료 인력 수급과 경영난에 갇혀 있던 '보건행정팀장'과 '민간 아동병원장'이 서로의 모자를 바꿔 썼을 때 숙의의 결정적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병원장 모자를 쓴 행정팀장은 필수 의료 인력 구인난과 야간 진료 적자가 민간 병원에 얼마나 치명적인 족쇄인지 통감했고, 공무원 모자를 쓴 병원장은 법적 책임과 한정된 공공 예산 속에서 도민 전체를 설득해야 하는 행정의 딜레마를 체감했다.
이 역지사지의 성찰을 통해 도출된 합의안은 단순한 중심가 대 외곽의 논리를 뛰어넘었다.
- 거점-연계형 의료 체계 구축: 진료 접근성과 전문의 수급이 용이한 원도심(구도심) 유휴 공공부지에 '달빛어린이병원 및 통합공공산후조리원 거점 센터'를 설치하여 구도심 상권을 활성화하고 접근성을 확보한다.
- 읍·면 이동형 복합 진료 및 교통망 연계: 소외된 읍·면 지역 주민을 위해 야간 안심 콜택시 및 권역별 응급 셔틀버스를 지자체가 전액 지원하고, 주 2회 전문의가 외곽 지소를 순회하는 '이동형 찾아가는 모자보건 케어반'을 상설 운영한다.
- 민관 상생 의료 거버넌스: 공공이 독자 시설을 지어 민간과 경쟁하는 대신, 기존 민간 아동병원을 달빛어린이병원으로 지정하고 야간 진료 운영비와 전문 인력 인건비 인센티브를 공공 예산으로 대폭 지원하는 민관 파트너십을 체결한다.
표면적 입장 뒤에 숨겨진 본질적 욕구(Need)를 서로가 대신 읽어주었기에 도출될 수 있었던 숙의의 성과였다.
현장 적용 3: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의 긴급 위기 조정
박소통 복지사의 소통 기술은 복지 현장의 가장 긴박하고 다층적인 내부 갈등 국면에서도 빛을 발했다. 지역의 장애인직업재활시설(보호작업장)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지자체 공공기관 우선구매 계약으로 체결된 1,000만 원 상당의 시청 기념품 포장 납품 당일, 오후 4시 납품 마감을 앞두고 오전 11시에 대형 사고가 터졌다. 과도한 소음과 팽팽한 마감 압박을 견디지 못한 중증 발달장애인 근로자 '민수 씨'가 스트레스로 돌발적인 도전적 행동(비명 및 포장 박스 파손)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급히 제지하던 생산관리기사 박 팀장과 실랑이가 벌어지며, 박 팀장은 손등에 찰과상을 입고 민수 씨는 커터칼에 손가락이 긁히는 부상을 입었다.
오전 11시 20분, 직군 간 충돌이 발생했다.
- 생산관리기사 박 팀장: "3시간 뒤면 시청 납품 트럭이 옵니다! 오늘 납기 못 맞추면 위약금은 물론 1년간 공공구매 자격이 박탈되어 다음 달 장애인 근로자 전원 임금도 못 줍니다! 민수 씨를 다른 방으로 분리하고, 직업훈련교사들도 전원 생산 라인에 투입되어 손을 보태야 합니다!"
- 직업재활교사 김 교사: "당사자 치료와 정서적 안정이 절대 우선입니다! 교사가 라인에 들어가 대신 작업하는 것은 재활 훈련 체계를 무너뜨리는 비교육적 편법이며, 민수 씨를 강제로 격리하는 것은 중대한 인권 침해 소지가 있습니다!"
오후 1시, 사태는 악화되었다. 연락을 받은 민수 씨의 어머니가 작업장으로 격분하여 뛰어왔다. "아이를 얼마나 쥐어짰으면 피를 흘리고 발작을 합니까! 경찰을 부르고 지자체와 인권위에 시설을 고발할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지자체 담당 주무관에게서 "오후 4시 행사용 납품 트럭 출발했지요?"라는 확인 독촉 전화가 걸려왔다. 사무국장실 앞 복도는 분노한 보호자, 납기일을 외치는 생산기사, 인권을 주장하는 재활교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 현장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박소통 복지사는 즉각 7개의 의자를 원형으로 배치하고, 7개 핵심 이해관계자의 이름표를 붙인 입장 토론(모자들의 수다) 테이블을 가동했다.
① 근로장애인 민수 씨: 과도한 기계 소음과 억압적인 납품 독촉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온 공포와 과부하.
② 직업훈련교사: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이용인의 인권과 신체적·심리적 안전, 재활의 원칙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③ 생산관리기사: 납기 미준수로 시설 계약이 해지되면 중증장애인 수십 명의 유일한 일터와 월급이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경영 책임의 공포.
④ 보호자(어머니): 안전망이 무너진 시설에서 자식이 학대받고 다칠까 봐 두려운 부모로서의 절박한 보호 본능.
⑤ 동료 근로훈련생: 작업장 내의 비명과 충돌, 고성이 너무 무섭고 불안해서 작업을 지속할 수 없는 공포.
⑥ 관할 지자체 공무원: 시청 행사의 공적 계약 이행 관리와 동시에 시설 내 인권 사고 발생 여부를 감독해야 하는 행정 책임.
⑦ 사무국장: 인권, 안전, 납기, 민원, 직원 갈등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어느 한쪽 편도 쉽게 들어줄 수 없는 고립무원의 책임감.
박 복지사는 격앙된 7명의 역할을 맞바꾸도록 하였다. 생산관리기사 박 팀장에게 '보호자(어머니)'의 역할 이름표를 전달하고, 김 교사에게는 '생산관리기사'의 이름표를, 분노한 어머니에게는 '동료 장애인 훈련생'과 '사무국장'의 이름표를 전달했다.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 생산관리기사 박 팀장은 약간 입술을 떨었다. "집에서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내 자식인데, 일터에 보내놓고 피 묻은 손가락과 겁에 질린 얼굴을 마주했을 때... 부모 심정을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당장 제품 상자 몇 개가 터진 것보다 내 아이의 안전이 무너진 것이 두려웠을 어머니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네요."
생산기사 역할을 하게 된 직업재활교사 김 교사도 상기된 얼굴로 "원칙과 인권만 앞세우며 박 팀장님을 몰았던 듯합니다. 하지만 오늘 4시 납품이 펑크 나면 1년간 공공구매가 정지되어 우리 시설 장애인 30명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월급이 끊긴다는 박 팀장님의 무거운 어깨를 외면했습니다. 시설 전체의 생존을 짊어지고 악역을 자처했던 팀장님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무국장 역할을 하게 된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권도 지켜야 하고, 납기도 지켜야 하고, 다친 아이와 직원들, 시청 민원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사무국장 자리가 이렇게 피가 마르는 자리인 줄 몰랐습니다..."
서로의 고통이 공명하면서 어머니는 경찰 신고와 인권위 진정을 멈추고, 민수 씨를 안심실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하며 안정을 유도했다. 김 교사와 복지관 지원 인력들은 생산관리기사의 지휘 아래 합법적인 긴급 업무 지원 인력으로 일시 전환되어 안전 수칙을 지키며 포장 라인에 합류했다. 지자체 공무원에게는 긴급 상황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납품 시간을 행사 당일 저녁 6시로 2시간 유예받는 행정적 중재를 이끌어냈다.
그날 오후 시설은 납품을 완수했고, 이후 직무 스트레스 완화 쉼터 설치와 도전적 행동 발생 시 '긴급 위기 대응 및 업무 분장 매뉴얼'을 전 직원이 함께 제정하는 제도적 마련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민주적 정당성과 숙의의 힘: 타인의 신발을 신는 120%의 지혜
마을의 작은 골목 공유주방에서 시작하여, 공공의료 인프라 배치 갈등, 그리고 복지시설 내부의 위기 상황에 이르기까지 박소통 복지사가 경험한 '입장 토론(모자들의 수다)'은 인간이 가진 인지적 편향과 자기중심성을 넘어,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견인하는 '실천적 의사소통 기술'이었다.
박소통 복지사는 2.5년 차의 치열한 현장 여정을 통해 사회복지사와 지역 활동가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실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갈등이 첨예할수록 표면적인 '입장'의 싸움에서 물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실질적인 '욕구'와 '두려움'을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진 역할과 생존의 무게에 충실하기 위해 마음의 방어를 한다.
둘째, 관점의 전환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역할을 최소 2~3회(또는 모든 역할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음)이상 전환하여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입체적으로 체험해야 효과가 높다. 아울러 몸과 마음의 긴장을 이완하는 신체적 전환 의식과, 물리적인 색상 교구재를 사용하고, 상대방의 언어로 소통해보는 물리적 경험이 수반될 때 비로소 역지사지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셋째, 사회복지사는 결론을 예단하고 주도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안전하게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볼 수 있도록 돕는 '중립적 촉진자(퍼실리테이터)'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합의안은 복지사가 아니라,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고통과 책임을 느껴본 갈등당사자들의 숙의 속에서 피어난다.
단순한 표결이나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의사결정은 패자에게 박탈감을 남기고 갈등을 지하로 숨어들게 만든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서툴지라도 서로의 입장을 경험해보며, 상대방의 자리에 서 보는 숙의의 과정을 거칠 때, 구성원들은 결과에 기꺼이 승복하며 공동체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난다.
새로운 현장의 도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2.5년 차 박소통 복지사의 손에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고 공동체의 상생을 밝혀줄 다채로운 지혜의 모자들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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