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에 ‘사람중심’을 탐(探)하다 By 정병오
- 2022-12-26
- 306
- 0
- 0
사회복지사도 제도를 만들 수 있나요?
정병오(휴먼임팩트 협동조합)
1. 첫 만남 : 무엇으로 고민을 시작하였는가?
“선생님은 몇 살이에요?”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4년간 자원 활동을 하던 복지관에서 잠깐 계약직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새롭게 추진하였던 방과 후 프로그램인 ‘아동교실’에서 처음 만난 초등학생 아이들은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변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결혼은 하셨어요? 아니면 대학생이세요? 우리 삼촌도 대학생인데,…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여러 가지 질문이 귀엽기도 하였고,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라도 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하하! 궁금한 게 참 많군요? 나이는 26살이고, 대학생과 비슷한데 정확하게는 대학원생이에요! 여자 친구 있는지는 지금은 비밀이고, 나중에 더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하하!”
다행이었다. 처음 만난 아이들은 주로 어머니나 할머니하고 사는 한부모 가정이거나 조손가정에서 살고 있었기에 혹시나 위축되어 낯선 선생님에게 전혀 말문을 열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하지만 내 편견이었거나 기우에 불과하였다.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학교가 끝나면 여기 ‘아동교실’에 와서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면서 재미있게 지내봐요.”
당시는 대학원생이었기에 이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지 못하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였던 지점은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성장해주도록 내가 힘껏 돕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그때 가정 상황을 벗어나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은 많이 부족하였다.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사회복지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 입학한 후 2년 가까이 행정고시를 준비하였지만,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제도와 정책에 관심이 없지 않았지만, 복지 실천 현장에서 직접 부딪혀가며 일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복지관에 도전해보던 터라 당시 아이들 앞에 두고 그렇게 깊게 고민하지는 못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영국과 미국의 인보관이 사회복지관의 모델이었지만, 인보관 활동의 선배라고 할 수 있었던 윌리엄 베버리지나 제인 아담스 같이 거시적인 변화에 대한 고민은 분명히 많이 부족하였다. 어쩌면 눈앞에 보였던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들로 인해 깊고 긴 생각과 고민을 하지 못하였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많이 부족하였지만, 이렇게 사회복지 현장에 자원 활동가가 아니라 실천가로서 첫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하여튼 그때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을 어떻게 잘 도울 수 있을까였고, 조금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 아이들의 가정까지도 함께 도울 수 있을까였다. 시작하던 이에게는 당연한 눈높이였을 것이다.
2. 고민 : 한계를 만나다!
대학원 공부하면서 잠깐의 경험이었지만, 복지 현장으로 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참 많겠다는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 품으며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할 무렵 학부 실습 지도자이셨던 선배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그분은 모 복지관을 퇴사하시고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북한이탈주민과 빈곤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단체를 함께 만들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나에게 제안하셨다. 마음속 생각과 맞닿아 있었기에 고민을 조금 하다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답을 드렸고, 두렵지만 용감하게 새로운 길에 도전하였다.
그 도전 당시 상황은 홍대 앞 인근에 있던 오피스텔에서 사단법인 설립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이 추진되지 못하고 있어 실무자로서 사업을 기획하고 후원을 개발해야 하는 역할이 필요하였다. 북한이탈주민을 직접 돕는 일은 당장 쉽지 않아서 축구단을 만들어 지원하는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일은 주로 실습 지도자이셨던 대표께서 추진하였고, 나는 주로 지역 내 위기 가정에서 돌봄으로부터 방임된 아이들을 돕기 위한 일을 준비하였다. 출발하던 때는 물론이고 일을 하던 몇 달 동안 월급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교통비만 받고 무보수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열정 하나만큼은 월급을 받고 조직에서 일할 때보다 더 컸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방과 후에 아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과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적, 인적 자원을 개발해야 하였다. 우선 공간 확보를 위해 서교동, 합정동, 망원동 일대의 교회 공간을 빌려보기로 하고 공문을 작성해 발송한 후 직접 발품을 팔며 돌아다녀 보았다. 10개 이상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교역자들을 만나 의논드렸는데 취지에 대해 공감은 해주었지만, 공간을 내주겠다는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예기치 않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대학 동창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통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 한 번 의논드려보겠다고 하였다. 다행히 돌아온 답은 친구 교회 담임 목사님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친구에게는 목사님을 찾아뵙고 직접 의논드리겠다고 하였고 직접 소통하게 되었다.
“목사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지역 교회에 제안을 해보았는데 긍정적인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역 내 어려운 가정이 많고, 특히 그 가정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지내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목사님의 존함이나 교회 이름이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망원동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였고, 40대 전후의 비교적 젊은 목사님이셨다는 사실이다.
“좋은 일을 하시려고 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이 동네에서 목회하면서 그런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거든요.”
지역에서 직접 경험을 했던 생각을 함께 나눠주시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다.
“저희가 신생 단체라서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10평 정도의 조그만 공간이라도 내어주신다면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와서 대학생 선생님들과 공부도 하고 간식도 먹을 수 있게 해주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말씀해주셨기에 용기를 내서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시네요. 교회에 기도실이 하나 있어요. 주중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죠. 주로 주일에 기도하거나 모임을 하는 공간이죠. 그곳을 쓰시면 어떨까요? 한 번 가서 직접 보시죠.”
교회 지하에 있는 기도실을 보여주시며 허락을 해주셨다.
정말 우연한 계기로 10평 남짓의 교회 기도실에서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 인근 지역 대학에 요일별로 아이들을 지도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게 되었고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다만 어려운 부분은 예산이 없어 아이들에게 간식을 제공하기 어려웠는데 인근에 있는 과자 대리점에 찾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지원받기로 하였고, 우유 대리점을 통해서도 가끔 지원받기로 하였다. 아무것도 없던 무에서 조금씩 채워나갈 수 있게 되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아이들을 추천받고 가정방문을 하여 어머니나 할머니를 만나서 아이들을 보내 달라고 말씀드렸다. 요즘 같으면 경계심을 보여 줄 상황이었지만, 그때가 1998년 초라서 워낙 아이들이 방치되고 어려웠던 시기라서 오히려 대부분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용기 있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 수요는 많았지만, 반대로 운영에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 당시가 1997년에서 1998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IMF 외환 위기를 맞게 된 그 시점이었기에 많은 기업이 줄도산 상태였고, 실직으로 힘들어하는 가정들이 점점 늘어갔다. 후원을 받아서 운영하려던 계획에 점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오래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 시기 고등학교와 대학의 선배였던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본인이 아는 복지관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일할 생각이 없느냐 하는 전화였다. 단체는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고, 나는 복지관으로 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모님께 약속드렸던 말씀에 책임을 지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자책감이 솔직히 아직도 남아 있다. 넘지 못할 한계를 직접 경험한 셈이었다.
3. 도전 : 한계를 넘는 시도를 해볼까?
복지 일을 시작할 때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어떻게 보면 실천가로서 초심을 형성해서 그런지 몰라도 어떤 조직에서 일하더라도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 대해 꾸준히 관심 가지게 되었다. ‘사랑의 열매’로 알려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모 카드사의 사회공헌사업을 기획할 때도 지역아동센터에 매년 2억5천만 원의 도서 지원사업을 3년간 추진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도 좋은 책을 읽으면서 성장하면 좋겠다는 신념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빈곤 청소년 진로지원을 돕는 기획사업을 발굴해 3년간 지원하기도 하였다.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복지 일을 시작하였을 때 마무리하지 못한 일과 아이들에 대한 자책으로 인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마음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기획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부채 의식을 가진 채 복지 실천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런 의식이 좀 더 본격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가정에서 빈곤으로 인해 꿈을 갖지 못하거나 소위 빈곤의 덫에 빠질 수밖에 없는 아동, 청소년 아이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있었다. 2011년부터 복지관을 운영하는 총 책임자가 되면서부터였다. 관장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그 고민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고, 복지관을 운영하는 법인 이사장님과 그 고민을 나누게 되었고 그 고민이 현실로 실현이 되는 논의 과정이 마련되었다.
복지관에서 직원 연수를 제주도로 떠났을 때 이사장님께서도 함께 하셨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사장님께서 법인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계신다고 하셔서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말씀드렸다.
“이사장님!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꿈을 아예 갖지 못하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준비하지 못해서 결국 계속 가난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법인에서도 지역아동센터를 여러 개 운영하고 있는데, 그냥 돌보거나 학습지원만 해서는 빈곤 탈출이 어려운 거 같아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거 같아요.”
이사장님께서 공감을 표현하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셔서 오랫동안 고민하였던 새로운 접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어 보았다.
“네 맞습니다. 이사장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꿈을 꾸고 자신의 진로를 탐색해서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별도의 전문적인 사업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아 그래요? 궁금하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나중에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네요. 나중에 더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해주세요.”
긍정적으로 반기면서 대답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복지관 부설의 ‘광명시 청소년진로지원센터’ 운영이었다. 원래는 청소년 앞에 ‘빈곤’이라는 단어가 붙었는데, 빈곤이라는 말이 낙인을 불러와 청소년이 사업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것 같아 빼기로 하였다. 마침 공동모금회에서 지원하였던 빈곤 청소년 진로사업 때 만났던 실무자가 복지관이 있는 지역에 살고 있어 그 업무를 맡겨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빈곤 청소년 진로사업을 법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연간 7~8천만 원 정도의 예산 규모로 2명의 실무자와 함께 시작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빚진 자처럼 마음에 짐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짐을 조금씩 내려놓는 기분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 사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하거나 직업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였던 아이들이 조금씩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직업을 탐색해보기 시작하였다. 미래 직업을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강점과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꿈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학교 다니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부적응하여 학교 출석률이 떨어졌던 아이들이 학교에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출석률도 높아지는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이 크게 향상되었고, 학업 성적에서도 좋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4. 성과 : ‘제도’라는 열매를 만들다.
복지관에서 자체적으로 하던 사업을 3년 정도 운영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장애를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업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기회가 마련되었는데 공동모금회 지원을 받아 한국사회복지관협회에서 ‘빈곤 대물림 예방사업’으로 3년간의 프로젝트 사업 공모가 계기가 되었다. 한 기관당 1년에 5억씩, 3년간 합쳐서 15억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복지 분야 민간 공모사업의 규모로 볼 때 아마도 최고 규모로 생각된다.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진로사업의 성과를 반영해 24세 미만의 빈곤 청소년을 위한 진로지원사업을 제안하였고 최종 선정되어 3년간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국 11개의 사회복지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24세 미만이기에 법적 청소년이 맞지만, 보통 18세가 넘어 20대의 경우 청년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청소년과 초기 청년을 위한 사업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여러 개의 복지관이 3년간 프로젝트 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제도화시켜보자는 시도로 출발하였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 복지관은, 아니 나는 그런 굳은 의지로 시작하였다. 인보관 활동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개혁을 부르짖던 베버리지와 같은 영국의 개혁가 선배들처럼 말이다. 당시에 그 사업을 맡았던 팀장에게 이런 나의 의지와 꿈을 이야기하였더니 내 얼굴을 보면서 어이가 없어 하면서 한 마디 뱉었다.
“관장님, 저희한테 너무 큰 부담 주시는 거 아니에요? 너무 큰 얘기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그래도 사업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관장님!”
부담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고, 내 의지가 그렇다는 거였다.
“하하! 부담은 갖지 않아도 돼요. 나에게 말하는 거니까요. 복지를 처음 공부할 때부터 프로그램을 시도하여 정책을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대학원 때 행정고시도 준비한 적이 있었지요. 일을 막 시작할 때에는 잊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꿈을 꾸게 되더라고요.”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헐 하우스’라는 인보관을 만들었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사회사업가 선배 제인 아담스도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집권 시기에 진보적인 복지정책을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줬거든요.”
부담을 줄여주고자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더 큰 부담을 준 셈이 되었다. 그 팀장은 결국 나와 눈을 마주치기를 거부하였다.
전국 11개 복지관이 ‘희망플랜센터’라는 같은 이름으로 3년 동안 각자의 지역 특성에 맞게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우리 복지관의 초점은 영국에서 추진해 성과를 낸 경험이 있는 ‘런페어(learnfare)’ 개념을 적용해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복지의 ‘웰페어(welfare)’는 복지 급여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것이지만, ‘런페어’는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방식의 복지였다. ‘학습(learn)’과 ‘복지(welfare)’가 통합된 개념으로 빈곤 청소년이 학교나 교육 프로그램에 출석하지 못해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준 이상의 출석률을 달성하면 소정의 장학금 방식의 현금을 지급해 출석률을 촉진하는 제도였다. 국내에서는 시도가 된 적이 별로 없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복지관 자체 사업일 때부터 시도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기에 접목하게 되었다. 그 사업을 중앙에서 자문하던 교수들은 반기지 않았지만, 우리 복지관에서는 밀어붙였다.
런페어는 기본적으로 학업을 위한 학원이나 진로 관련 직업기술을 익힐 수 있는 학원에 다닐 수 있는 비용을 대신 지급해주는 방식은 물론이고 현금성 지원도 일부 진행하였다. 실제 아이들은 차비가 없어서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30분 이상의 거리를 걸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돈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런 아이들에게 런페어의 출석률 달성에 대한 현금 지원은 배움의 동기부여에 매우 의미 있는 참여 촉진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 결과 다른 지역 센터의 아이들에 비교하였을 때 학업이나 프로그램 출석률이 매우 높았고, 그런 출석률은 진로와 관련된 성공적인 변화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사례로 연결되었다. 대학을 포기하였던 아이들이 대학으로 진학을 하였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여 방황하던 청년들이 취업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좀 더 적극적인 고민의 과정이 있었는데, 2년 차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 제주 워크숍에서 한 아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제주 협재 해수욕장에서 아이들과 물놀이 하는 중에 한 중학교 2학년 아이가 나를 보더니 질문을 해왔다.
“선생님! 저는 올해 처음으로 이 사업에 참여하게 돼서 너무 좋아요. 제 꿈을 찾았고 꿈을 위해 열심히 춤을 추면서 노력하고 있거든요. 근데 내년까지만 하고 끝난다고 해서 너무 아쉬워요. 학교하고는 다르게 제 꿈을 지원해주니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마음속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그래. 복지관에서도 고민하고 있단다. 이 일이 그렇게 끝나지 않고 더 오래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단다. 같이 노력해보자.”
단순히 이런 프로그램의 세세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3년 기한의 센터 운영이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해 사업 초기부터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아이들과 부모님의 기대로 인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업 초기부터 꾸준히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지방의회 의원, 시민단체 활동가, 타 복지관 사회복지사, 청소년 관련 단체 활동가, 학원연합회, 중고등학교 선생님, 직업체험기관 대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토론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당사자는 사업에 참여하는 청소년과 청년 당사자였고, 부모님이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부모님 자조 모임을 사업으로 추진해나갔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간담회나 정책 토론회 자리를 여러 차례 만들어 냈다.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가의 압박과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의 역할이 매우 의미 있었다. 조례 제정의 가장 주도적인 역할은 지방의회의 의원들이었고, 더 중요한 역할은 초안을 작성하였던 그 프로젝트의 팀장 역할을 하였던 사회복지사가 하였다. 사업 초기부터 오랫동안 소통하고 의논해 왔던 결과였다. 이런 소통과 공유의 과정이 세부 사업의 실제 성과와 연결되면서 3년 차에는 ‘희망플랜광명센터’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 제정을 성공적으로 제정할 수 있게 되었다.
‘광명시 빈곤 청소년과 가족의 빈곤 대물림 차단을 위한 조례’가 2018년 4월 25일에 제정되었고, 그 조례 제4조에는 ‘희망플랜광명센터의 설치 및 위탁’과 관련된 내용이 규정되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반영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 기반인 조례를 제정하였기에 센터의 민간 지원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 4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이 사업은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조례로 제정하게 되어서 복지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에게 가졌던 부채 의식과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사회복지 실천가인 사회복지사도 좋은 사업을 기획해서 실천하면서 성과 만들어 낸다면 얼마든지 그 사업이 지역의 확고한 정책과 제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줄 수 있어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심장이 빠르게 뛰며 가슴이 벅차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사회복지사도 지역 내에서 제도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댓글
댓글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