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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는 운인가? 기술인가? ①번. 운, ②번. 기술. 운7기3은 공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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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는 운인가? 기술인가? 에 대하여 글을 준비합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반영하고자 합니다. 댓글로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주신 의견들이십니다. 의견을 참고해서 아래와 같이 저의 의견을 드립니다. 결론은 운칠기삼이 공정합니다.



성과는 운과 기술의 조합입니다. 아무리 가진 기술이 출중하여도 운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거나 그 정도가 크지 않습니다. 기술은 별로 가진 것이 없지만 운이 좋아서 성과가 좋기도 합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운이 70%, 기술30%에 달려 있다는 것으로써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되지 않거나,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운이 좋아 일이 이루어질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청나라 시대의 문인 포송령이 지은 요재지이(聊齋志異)라는 소설에 나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한 선비가 그렇게 노력하고도 죽을 때까지도 과거에 급제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집안은 몰락합니다. 그가 죽은 후 옥황상제에 불려나가자 따져 물었다고 합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많이 먹기라는 술내기를 시키고 '정의의 신'이 이기면 선비가 옳고 '운명의 신'이 이기면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라고 선비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내기의 결과 '정의의 신'이 3잔을, '운명의 신'이 7잔을 마셨습니다. 옥황상제는 세상은 정의가 아닌 운명에 의해 정해지는데 꼭 운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성과가 좋았을 때 겸손의 표현으로 운칠기삼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가볍지 않습니다. 요재지이에서 나오는 정의와 운명의 신의 술내기는 오늘날 공정과 능력주의에 관한 질문입니다. 사람의 성과에 있어서 운과 기술이 어떤 비율로 작용을 하든, 오늘 날에는 공정과 능력주의와 관련됩니다. 여기 두 가지의 예를 들어봅니다. A) 운이 많이 작용한 성과라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해진 조건이 너무나 좋지 않아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사람이 운에 의해 성과를 얻었다면 공정한 것일 수 있습니다. B) 기술이 많이 작용한 성과라면 그것은 공정한 것일까요? 이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처해진 조건이 좋은 사람은 기술을 습득할 기회(운)가 많았을 것이니, 공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A나 B의 사례 모두 크던 작던 간에 사람의 성공에는 운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운칠기삼에서 '운'은 '자연적 운'과 '사회적 운'으로 나눕니다. '자연운'은 부모운, 소질운, 건강운, 머리운, 이렇게 4가지입니다.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으로써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운입니다. '사회운'은 시대의 상황, 만나게 되는 사람, 자신이 가진 자원, 이렇게 3가지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운입니다. 능력이 좋다는 것은 좋은 기술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술이 많은 이유는 열심히 노력한 이유도 있지만 좋은 소질과 부모의 배경 등의 '자연운'이 작용한 이유도 있습니다. 좋은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열심히 노력한 이유도 있겠지만 좋은 네트워크, 좋은 스승, 좋은 기회 등의 '사회적 운'이 작용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다름아닌 운입니다. 사람들은 이 운을 노력이라는 말로 치환하지만 사람의 성공은 결국 운이 작용한 것 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성공적인 삶을 살 게 된 것은 오직 내 노력의 댓가이고 이를 영위하는 것은 내 권리라는 말은 정정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이든 사회적이든 운이 작용한 것임으로 성취한 자신의 성공을 그 사회 및 자연과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노력한 댓가이니 내가 소유하는 것은 합리적이다'라는 비합리적인 믿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는 편향과 착각에 의해 움직입니다. 이것이 시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편향에 의한 비합리적 믿음은 다수의 운이 없는 개인을 실패하게 만들고 주인이 없는 자본을 만들어냅니다. 주인을 잃은 자본은 소수의 성공한 이들에게 보상으로 흘러가 축적됩니다.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은 편향과 착각의 비합리적인 존재이지만 운 덕분에 성공했을 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운에 의해 성공한 것이고 운이 안 좋은 다른 사람의 실패한 자본을 가져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수가 획득한 자본은 노력에 의한 성공이기보다는 운이 작용한 결과이니 마땅히 그 사회와 나누어야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선한 의지'에 의해 움직입니다. 경쟁, 소수, 약육강식에 의한 축적되는 자본이 아니라 연대와 공생으로 분배되는 자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정의가 아닌 운명에 의해 정해지고 꼭 운만이 아닌 '사람의 선한 의지'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운칠기삼'은 사람의 삶이 오로지 운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확정이 아닙니다. 또한 기술과 노력의 비중이 운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성공에 있어서 운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니 그 운을 사회와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여러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가장 잘하는 기술 3개 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공정합니다. 운이 없더라도 3가지의 가장 잘하는 기술을 익히면 되니까 말입니다. 만약, 운이 3할인데 기술이 7할이라면 사람의 삶은 기술만 익히다가 세월을 보낼 것입니다. 많은 기술을 익혔더라도 3할이라는 운에 결정된다면 사람은 애써 기술을 익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열심히 노력해서 7가지의 기술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3개의 운에 결정된다면 그것은 불공정합니다. 그러므로 운이 3할인 것보다는 7할인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운삼기칠'보다는 '운칠기삼'이 더 공정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사회는 '운삼기칠'을 요구합니다. '운삼기칠'은 소수의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합니다. 아니 그들은 운칠기삼도 유리합니다. 운이든 기술이든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능력주의에 의해 다수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적은 운과 많은 기술인 '운삼기칠'로 성공해야 한다면 삶이 너무나 처절해 집니다.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기술 7개를 습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운 3개에 의해 노력의 결과가 결정됩니다.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아이들을 보십시오. 기술 7개를 얻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합니다. 결국 7개의 기술을 얻었다고 해서 성공이 담보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운 3개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결혼을 주저하고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최저출산율의 불명예의 원인은 '운삼기칠'을 요구하는 능력주의 사회에 있습니다.


공정한 사회는 '운칠기삼'입니다. 기술 3개를 익히고 7가지의 운에 성공여부를 맡깁니다. 여기서 끝난다면 '운삼기칠'과 다를바 없이 불공정합니다. '운칠기삼'에 의한 성공의 결과는 '의지'에 의해 나누어야 합니다. 성공이란 것이 '자연운'에 의해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면 당연히 사회와 나누어야 할 것이고, '사회운'에 의한 성공이라면 당연히 자연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운'이나 '사회운'이나 둘 다 거져 받은 것이니 그 사회와 자연에 거져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운'과 '자연운', 그리고 '사람의 의지'에 의한 나눔 속에서 3가지의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렇게해서 사회는 더 공정해 집니다. 한자의 운(運)은 옮기고 나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옮기고 나를까요?' 맞습니다. 운입니다. 행운입니다. 거져받았으니 거져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선한 의지'입니다. 사회는 시장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야 합니다.


물론 거져 받은 운이라고해서 사람은 거져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은 합리적이 아니라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편향과 착각으로 나누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운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의지'의 인위적 시도가 바로 '제도'입니다. 이 제도의 핵심적 가치는 '인간의 존엄'과 '배분적 정의'입니다. 이 가치가 제도로 실현되는 것을 '사회복지'라 합니다. '사회복지'는 사람의 안녕을 위한 사회적 노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의지'를 촉진하는 사회보장, 주택보장, 공공위생, 사회서비스에 노력을 경주하여야 되는 이유입니다. '운칠기삼'에 의해 비록 운이 없어서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보장이라는 제도로 다시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하는 사회가 건강합니다. 이 제도가 실현될 때 '운칠기삼'에 의해 소수에게 집중될 수 있는 권력과 자본을 다수의 사람들의 삶을 증진할 수 있도록 '운'을 옮기고 나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의 제도는 '운'을 옮기고 나릅니다. 소수의 가진 자들도 제도의 의해 '운'을 퍼 나르게 됩니다.


동아일보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한규섭 연구팀은 20대 청년 10명을 인터뷰하여 언어 연결망을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조사는 공정에 대한 청년세대의 의식을 파악하는 목적이었습니다. 조사결과 이렇습니다. 그들은 공정을 설명할 때 보수성향의 청년은 '기회와 능력'이라는 단어를, 진보 성향의 청년은 '다양과 개인'이라는 단어를, 공통적으로 '사람과 사회'라는 단어를 썼다고 합니다.(동아일보 사회면, 2021.04.05, 조응현기자,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405/106242637/1)




보수는 ‘기회-능력’, 진보는 ‘다양-개인’… 공통 단어는 ‘사람-사회’ 기사 중


오늘 날의 사회는 한 마디로 공정성이 최대 이슈입니다. 그런데 이 공정이라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사람의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기사에서는 이를 진보와 보수라는 성향으로 구분하였지만 실제로는 '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입니다. 비슷한 기간에 한겨레와 에스티아이 리서치기관은 20대 청년 520명을 표본으로 하여 20대의 능력주의에 관하여 분석하였습니다.(20대가 말한다. 능력주의와 공정, 한겨레 사회면 2021.12.21, 김미향기자,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2910.html) 아래의 그래픽(출처 노수민 기자)을 보면 진보와 보수의 성향이라는 것은 청년들이 경험한 '운'과 관계됩니다. 즉 젊은 세대의 성향이라는 것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자연운'과 학력이라는 '사회운'과 관계됩니다. 운에 의해 청년들은 능력주의와 공정을 이렇게 각기 다르게 해석합니다




'자연적 운(부모의 재력)'이 기회가 된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운(학력)'에 따라 능력주의를 이해하는 것 역시도 모순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운에 의해 기회의 평등, 능력과 공정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적은 운과 많은 기술로 삶이 결정되는 '운삼기칠'의 사회가 맞습니다. 오늘 날 청년세대가 느끼는 사회는 온갖 기술을 다 배워야 하지만 결국 운이 너무나 많이 작용합니다. 그것이 능력주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적은 3개의 운을 누가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가 기회인 것이며 이로 인한 결과가 능력주의입니다. 기회부터가 공정하지 않으니 능력주의는 그 자체가 불공정합니다. 이러한 운삼기칠의 사회에서 청년들이 일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 조직에서 조용한 관둠을 하는 것, 일과 생활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 일의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 선택입니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선택을 비합리적이라 바라 보겠지만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청년세대는 성향에 따라 '개인과 다양', '능력과 기회'를 중요시 생각하지만 '기여내지는 분배', '선의내지는 의지'라는 단어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능력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기여에 의해 내가 가지게 된 것이고 그 능력은 사회를 위해 나누어야 하는 성질인데도 말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지 선한 의지에 의해 작용되는 것임에도 책임과 결과만을 따집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청년세대의 입장에서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러함에도 청년세대는 공통적으로 '사람과 사회'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네 맞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과 사회'를 선호합니다. 사람은 자신이요, 사회는 공동체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는 '사람의 선한 의지'를 촉진하기 위한 '제도'를 설계하여야 합니다. '능력과 노력을 재촉'하는 사회에서 '선한 의지를 촉진'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능력주의로 포장한 '운삼기칠'의 사회에서 서로가 기여하는 '운칠기삼'의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운에 의해 받은 것이니 기꺼이 사회와 나누는 사람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조직들이 존경받아야 합니다. '자연운'이 없는 사람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야 합니다. '사회운'이 없어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운에 의해 가진 사람들이 선한 의지에 의해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 성찰은 청년세대의 몫 이전에 기성세대가 나서야 합니다. 세상은 정의가 아닌 운명에 의해 정해지고 꼭 '운'만이 아닌 '사람의 의지'에 의해 정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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