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상식 By 이용교
-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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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평생 보살핀 소진택 회장
이용교
(광주대 교수, 복지평론가)
사회복지법인 광주삼광복지회를 창설한 소진택(蔬鎭澤) 이사장은 1934년 1월 7일 전남 보성군 복내면 반석리 633번지에서 부친 소백규와 모친 염부순의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나 60여 년간 사회복지사로 공헌하고 2018년 2월 17일(84세)에 별세했다. 소진택 회장님은 한국전쟁 직후 사회복지를 시작하여 전남도청 수석 아동복리지도원으로 일하였고, 대한사회복지회 전남지부장으로 다양한 사회복지를 개척하였다. 사회복지법인 광주삼광복지회를 설립하여 영유아보육사업의 지평을 넓히고 광주생명의전화를 설립하였다. 이 글은 필자가 2014년 2월에 소진택 회장을 인터뷰하여 쓴 단행본 ‘소진택의 생애와 복지활동’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과 가족이 제공한 사진 등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청운의 꿈을 꾸고 숭일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선돌’이란 소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차남인 아버지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농사일만 했지만, 문덕면 참봉댁에서 자란 어머니의 영향으로 향학열을 키웠다. 또래 아이들보다 늦게 소학교에 갔지만 공부를 잘해 급장과 학생회장도 맡았다.
고등공민학교를 다닐 때 6·25가 발발하였다. 전쟁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친구를 따라 광주로 왔고, 전남도청의 호위경찰인 마을 어른의 소개로 문교사회국장실에서 사환으로 일하였다. 안용백 국장의 추천으로 숭일중학교(야간부)에 진학하였다. 당시 도청 후생국 후생과 부녀계장은 조아라 여사이고 직원은 서경자 여사였다. 그는 도립모자원(불로동 소재)에 방을 얻어 기거하면서 낮에는 도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숭일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광주영신원에서 사회사업가의 길을 시작하였다>
그가 사회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서경자 이사장과 인연 때문이었다. 서경자 여사는 도청 공무원이면서 1952년에 설립된 전남도립모자원을 맡아 운영하다가 세계기독교선명회(월드비젼)에 가입해 지원금을 받아 영아원인 광주영신원을 시작하였다(1956년 5월 1일에 설립). 당시 기아가 많아 일 년에 전남에서만 약 300여 명이었다. 가족은 숟가락 하나라도 줄이고, 고아원에 가면 먹여주고 학교는 보내주기에 버려졌다. 당시엔 전쟁고아도 많고, 양민학살 사건의 피해자도 적지 않았다. 좌익활동을 하다 입산하면 부모 노릇을 못하니까 자식은 고아원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시·군별로 1~3개씩 고아원을 만들었다.
그는 영신원에서 직원과 아이들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 사회사업가로 일했다. 행정고시에 뜻을 두고 조선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였지만, 서경자 원장이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계절대학(1년에 2번 방학때 운영)에서 사회사업학을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로를 바꾸었다. 계절대학에서 중앙신학교 김덕준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지윤 교수, 서울대학교 하상락 교수 등의 강의를 들었다. 한편, 미션 스쿨인 숭일중학교에서 기독교를 접했지만, 도청에서 일할 때 서경자 여사의 권유로 광주동부교회에서 백영흠 목사를 만나 신앙심을 키웠다.
영신원에서 일하다, 1961년에 아동복리법이 제정되고 아동복리지도원으로 채용되었다. 전남도청에서 공채로 합격하여 광산군청(현 광산구청)에서 일하였다. 그동안 아동복리지도원은 임시직으로 주로 여직원이었는데, 공채로 바뀌면서 4급(현재 7급) 공무원 대우를 받았다. 당시 고아원은 세계기독교선명회, 기독교아동복리회, 컴패션 등 외원기관이 후원금을 주면 원장이 아동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지고 직원 인건비도 주었다. 정부는 부식비라고 간식비 정도만 한 달에 한 번씩 지원했다. 외원기관이 주로 지원하였기에 행정적인 지도·감독은 참 애매했다. 광산군청에서 일할 때 외원기관 기독교아동복리회(현 어린이재단)이 아동복리시설(백선육아원, 용진육아원 등)의 아동을 후원하였는데, 지역사회의 어려운 아동 100명으로 확대시켜 거택구호를 시작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면사무소로 대상 아동(대개 초등학생)을 불러 결연금을 지급하였다.
공개 채용된 아동복리지도원은 4년제 대학 출신이 많았는데 대우가 낮아 그만두는 사례가 많았다. 전남도청 수석 아동복리지도원으로 일하면서 각 시·군에 아동복리지도원들을 지도하고, 복지시설이나 아동을 위한 거택사업을 지도·감독하였다. 정부가 국내 입양을 권장했기에 매년 화정동에 있는 가톨릭 피정센터(현 광주대교구청)에 아동복리지도원을 모아 국내입양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강사는 대한사회복지회 탁연택 회장 등이었다.
<대한사회복지회 전남지부에서 아동복지를 개척하였다>
당시 전남에서만 기아가 일 년에 300명 정도 생겼다. 이 아이들이 고아원에 입소하면 시설을 매년 더 늘려야 하기에 목포의 사례(1962년에 목포시, 한·노협회, 카나다유니테리안봉사회가 공동으로 목포아동결핵병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이후 한·노협회 등은 기아를 일시보호하였다)를 참고하여 일시보호소를 구상했다. 대한적십자사 김두옥 전남지사장에게 부탁하여 적십자병원에 방 하나를 빌려 기아일시보호소를 만들어 버려진 생명들을 보호했다. 도지사 부인과 간부 직원 부인들의 봉사모임인 ‘백합회’가 쌀과 부식을 제공하였다.
적십자 내에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생겨 일시보호소를 따로 마련할 참이었다. 1954년 1월에 고아와 혼혈아동 입양을 위해 정부(사회부)에 의해 ‘한국아동양호회’로 설립된 대한사회복지회(당시 대한양연회, 1971년에 명칭 변경)는 입양할 아이들이 필요하였고, 영광 출신인 탁연택 회장이 광주시 소태동에 일시보호소를 만들었다. 그는 1969년 4월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전남지부장을 맡았다. 초기 1~2년간 까리다스수녀회가 임시 위탁하였고, 3년째부터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초창기에는 영아일시보호소를 운영하면서 한 해에 국내·외 입양을 300명 정도 했다. 당시 국내입양은 비밀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시내 다방에서 상담하고, 합의되면 양부모가 시설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데려갔다. 입양이 결정되면 사진을 찍어서 남겨두고 가정조사를 하였다. 당시 대한사회복지회는 국내입양을 많이 했고 국외입양은 홀트아동복지회가 주도하였다.
탁연택 회장의 고향인 영광군 염산면에 복지관을 준비하려다 정부가 권장하는 어린이집을 설립하였다. 이후 전남 나주군의 제안으로 이화영아원 자리에 전남영아보호소를 설치하고, 새 중앙회장의 주선으로 송정리에 송정어린이집을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기아의 성격이 미혼모의 자녀로 바뀌면서 입양기관에 의뢰된 아동들도 바뀌었다. 산업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미혼 청년은 이성문제를 겪었고 미혼모 상담도 늘었다. 아이를 낳고 키울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입양을 원하는 사람도 있어서 입양을 알선하였다. 정부는 국내입양을 권장하면서 공직자에게 결연을 권장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한편, 광주직할시(광역시) 설경희 국장의 부탁으로 청소년종합지원센터(현 광주광역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1990년 2월에 설립하였다. 필자는 1991년에 한국청소년연구원에서 ‘청소년상담사업 활성화 방안’을 연구할 때 청소년종합지원센터에서 소진택 소장을 처음 만났다. 이 센터는 초창기에 광주와 대구 밖에 없었고, 이후 부산, 충북 등에 순차적으로 생겼고 현재 전국 모든 시·도와 시·군·구에 설치되었다.
<전남사회사업가협회를 설립하고 연대활동을 하였다>
1967년에 한국사회사업가협회가 창설되었고, 1975년에 그가 주관해서 전남사회사업가협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시설장 중에는 중앙신학교 출신 사회사업가들이 많았고, 협회에는 광주시청 고송주 공무원, 용진육아원 민명철 원장 등이 적극 참여하여 협회장을 이어받았다. 이후 전남협회는 광주·전남사회복지사협회로 이름이 바뀌고, 광주직할시가 생기면서 광주협회가 계승하고 1998년에 전남협회(초대 회장 윤동성)가 독립하였다. 초기에는 협회 회원도 몇 명 안 되니까 시·도 조직만 유지하고 간혹 점심이나 먹으면서 사회사업계 동향 등을 이야기했다.
초창기 광주에 한 10개 아동복지시설이 있어서 아동복지시설연합회가 정부와 외원기관의 지원을 받아서 사회복지계를 대표했다. 광주에서 1928년 6월 13일에 부랑걸식 폐질환자 22명으로 처음 생긴(1930년 12월 1일 광주공제조합으로 개명) 무등육아원, 행복원, 신애원 김오현 원장, 광주애육원 윤병진 원장, 성빈여사 조아라 원장, 영신원 서경자 원장, 대한사회복지회 소진택 지부장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가 폭넓게 대인관계를 하게 된 것을 청소년기에 도청 문교사회국장실에서 일할 때 기관장, 지역 유지 등을 보고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도청 공무원이었기에 공무원들이 예우해주었고 자연스럽게 민관 소통 창구의 역할을 하였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책임자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구청장이나 시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는 지역 사회복지계를 대표하면서 대한사회복지회에서 고성희 실장(박사), 정옥희 소장(박사), 김재영 지부장, 강은숙 소장 등 인재를 양성하였다.
<광주삼광복지회를 설립하고 영유아보육을 실천하였다>
광주영아일시보호소에 들어온 영아들 중에는 기아가 많았지만 다시 아이를 찾으러 오는 여성들도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초·중·고 여교사 회장들이 찾아와 아이를 낳으면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참 힘들었는데 아동복지시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영아전담어린이집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무렵 한 아주머니가 밤에 일해야 하는데 갓난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고 사정해서 그 아이를 재우는 것이 계기가 되어 영아전담어린이집을 인가받았다. 그가 처음 시작한 이후 영아전담어린이집은 전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이보다 먼저 보성삼광어린이집을 만든 것은 주암댐이 생기면서 많은 주민들이 이사갔는데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후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보성군 북부 4개 면(복내면, 문덕면, 겸백면, 율어면) 아이들만 받아도 어린이집이 되겠다 싶어서 군청과 협의하여 시설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아수가 70~80명이었는데 최근에는 20명 미만으로 줄었다. 그는 2011년부터 한일보육교류협의회 한국 대표를 맡아 한국과 일본의 보육시설 시설장과 교사들이 매년 교류하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전국적으로 자살문제가 심각하여 우선 전화상담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2004년에 광주생명의전화를 설립하였다. 생명의전화는 이미 서울, 부산, 인천, 전주 등에서 잘 되었지만, 당시 광주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회복지사의 꿈은 대를 이어 꽃 피고 있다>
소진택 회장은 사회봉사의 공적을 인정받아 2002년에 광주시민대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반려자 채희순 여사는 이웃마을(안골)에서 자라 집안 어른들도 아는 관계로 혼인하였다. 자녀중에는 사회복지사가 많아 복지 가문이라 부를 수 있다. 5남매 중에 첫째 딸은 전남도청 공무원, 둘째 딸은 사회복지공무원이고 사위는 어린이재단에서 정년하였다. 셋째딸도 사회복지공무원, 넷째딸은 보성삼광어린이집 원장, 막내 며느리는 광주삼광어린이집 원장을 계승하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소진택 회장은 새로운 시설을 10개 정도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모델을 제시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끝으로 사회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들이 제 자리를 잡고 활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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