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밖복지 By 노수현
- 2023-12-18
- 250
- 3
- 0
변화를 만드는 평가, 반복만 되풀이하는 평가
평가에는 목적이 있다. 첫째, 평가는 지속하기 위해서 한다. 기관이 올해로 위탁을 끝내고 모든 사업을 종료한다면 평가할 필요가 없다. 끝났는데 무슨 평가인가? 야속하지만 내가 그만둬도 평가는 의미가 없다.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사직인데 평가보고서를 잘 만들든, 평가를 잘 받든 뭐하겠는가? 평가를 잘 받든 못 받든 달라질 것은 없다. 둘째, 평가는 잘하기 위해서 한다. 지속하나 발전이 없고 오히려 퇴보한다면 더 큰 문제다. 투입된 자원만 낭비되기 때문이다. 평가는 더 잘하기 위해서, 계획의 적정성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찾고 성과를 정리한다. 셋째, 평가는 비교하기 위해서 한다. 다른 기관과 비교하여 우리 기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비교가 경쟁을 부추기고 줄을 세우는 나쁜 도구만은 아니다. 다른 기관과 비교하여 우리 기관의 편견을 깨우치고 기관의 위치를 점검하는 효과가 있다. 비교의 대상이 꼭 다른 기관은 아니다. 작년과 올해, 상반기와 하반기의 기관 변화를 시간 차이로 비교하는 방법이다.
평가의 목적에서 볼 수 있듯이 평가에는 분명 긍정적 효과가 있다. 하지만 현장의 평가는 이런 긍정적 효과가 사라진 지 오래다. 물론 주된 이유는 보조금을 주요 재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조금은 높은 책임성을 요구한다. 복지관의 평가가 엄격해지는 이유다. 보조금은 개별 기관의 유연성보다 관리의 효율성이 중요하다. 복지기관의 평가가 개별기관의 특성을 고려 받지 못하고 획일화된 잣대로 평가받는 이유다. 자연스럽게 평가 본연의 긍정적인 효과는 사라지고 복지기관의 평가에는 볼멘소리가 넘친다. 복지기관은 평가를 위한 운영으로 고착되고 평가를 위한 실천과 이를 증명하기 위한 문서만 늘어난다. 복지기관 평가의 딜레마다. 평가는 필요하고 또한 받아야 하지만 부정적인 효과가 더 많아진 지금의 상황 말이다.
기관장의 결단으로 평가에서 조금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이건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다. 보조금을 주요 재원으로 사용하는 한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현재의 평가 방식을 유지하되 문서량을 최소화하는 방법과 계획하지 않은 성과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우선 문서량을 최소화하는 방법부터 실천해 보자. 올 한해 환경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평가의 최종적 결과는 문서다. 한 장의 평가 결과 보고서와 10장의 평가 결과 보고서가 있다면 어떤 경우가 더 평가를 잘 받을까? 둘 중의 하나로 대답했다면 오답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문서량과 평가는 상관이 없거나 매우 부차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10장의 평가 결과 보고서가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 성실 점수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퇴근을 늦게 하면 인정받는 시대에는 그랬다. 지금은 아니다. 내용 없이 보고서 장수만 많으면 성실 점수를 못 받는 정도가 아니라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기관이 얼마나 과거에 묶여서 양으로만 일하는지를 널리 알리는 일이다.
00기관의 프로그램 자문을 갔었다. 환경 캠페인 프로그램이었는데 결과 보고에, 논문에서 찾은 공인된 척도 2개를 사용하고 있었다. 논문을 찾은 정성과 그것을 프로그램에 적용한 문서력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프로그램이 목표한 것을 실질적으로 이뤘는지는 다시 물어야 한다. 또한 프로그램의 목적에 비해 공인된 척도도 너무 과했다. 이번 주에 운동을 시작했는데 체지방 분석, MRI 측정, 고밀도 검사를 실시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장비를 사용할 자원과 시간을 운동에 더 투자해야 한다.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는 대표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문서량을 어느 정도 줄여야 할지 모른다면 좋은 방법이 있다. 알고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다른 기관의 유사한 프로그램 평가 결과 보고서 10개를 수집하자. 다음은 문서량의 평균을 낸다. 평균이 5장이라면 이제 선택이 남았다. 최저와 최고 수준은 피하고 평균 대비 목표를 잡는다. 앞서 평가는 문서량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이런 방법을 제안하는 것은 복지관의 문서 관행을 고려한 차선책 제안이다.
문서량을 줄이는 것은 현재의 평가제도와 기관의 관행을 고려한 수동적 대응 방법이다. 수동적 방법은 현재 수준을 유지할 수는 있으나 변화의 폭을 넓히기는 어렵다. 능동적 대응 방법이 필요하다. 계획하지 않은 성과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평가는 계획을 평가한다. 계획에 없는 것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낚시를 예로 들면 오늘 계획은 안면도에서 바다낚시 5시간이고, 목표는 광어 10마리다. 그런데 낚시가 내가 바라는 물고기만 낚이는 건 아니다. 숭어가 걸리기도 하고 생각도 못 한 비싼 참돔이 낚이기도 한다. 그러나 계획 대비 평가는 비싼 참돔도 중요하지 않다. 광어가 몇 마리냐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복지기관은 계획 대비 평가가 치밀하게 적용된다. 치밀하다는 표현을 굳이 쓴 이유가 있다. 횟수, 인원수까지 세밀한 목표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예산을 절감하고 목표에 집중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세밀한 목표에만 집중한 나머지 더 중요한 성과를 놓치게 된다. 참돔을 잡아 놓고도 광어 개수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낮은 평가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의 평가 방식을 유지하되 계획에 없던 성과에 집중해 보자. 나도 모르게 놓쳤던 참돔을 찾아보자는 말이다. 복잡한 척도를 쓸 필요도 없다. 담당자가 한 해를 돌아보면 된다. 평가, 성과라는 고급스러운 단어 대신에 ‘자랑거리’라 생각하자. 자랑거리를 찾으면 된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동료에게 묻고 지난 기록을 더듬어 보자. 가장 중요한 기록은 담당자의 실천 속에 있다. 일지에는 죽은 정보가 있고 담당자의 세포에는 살아 숨 쉬는 정보가 있다. 그것을 꺼내면 된다. 꺼내려면 뇌가 유연해져야 한다. 복지관 회의실에서 관장님의 지시로는 꺼내지지 않는다. 복지관 회의실보다는 외부 카페에서, 관장님의 지시보다는 동료의 칭찬 속에 뇌는 유연해지고 기억 속에 저장해 놓았던 자랑거리들을 하나씩 풀어낸다.
00 복지관 실무자들과 그런 시간을 가졌다. 복지관 밖에서 동료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따뜻한 밭이 마련되니 실무자들이 하나둘씩 계획하지 않았던 성과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청년 고립 사업 담당자는 계획에 없었던 반찬가게 사장님의 참여에 주목했다. 예산으로 반찬을 사서 청년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는데, 대화 중에 반찬의 용도를 알게 된 사장님이 생각지도 못한 후원과 향후에도 지속적인 참여 의향을 보이셨단다. 우리가 문서에서 추상적으로 사용하던 ‘지역자원개발’, ‘이웃 관계망 형성’의 사례다. 계획 대비 평가에서는 청년에게 반찬 전달의 목표만 말한다. 10개 목표했는데 12개 전달해서 120% 달성으로 표현한다. 반찬 가게 사장님 이야기는 빠지거나 빈칸에 담당자 의견이나 과정기록 정도로 남긴다. 잡은 광어 개수만 세고 귀한 참돔은 광어가 아니라고 풀어주는 격이다.
왜 계획에 없던 성과가 중요하냐면 시대가 갈수록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의 폭이 좁고 예측이 가능한 시대에는 사업계획이 치밀할수록 실수를 줄이고 자원을 집중하여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계획서를 쓰는 와중에도 환경이 바뀐다. 그렇다고 계획 없이 일할 수는 없지만 계획에만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축적한 구글도 변화 예측이 안 돼서 중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실천하면서 계획을 보완해야 한다. 실천에서 얻은 성과인 자랑거리를 다음 계획에 담으면 된다. 위의 00 복지관 청년사업 담당자의 예로 돌아가면 내년에는 지역사회 청년을 위한 ‘이웃가게’를 계획에 포함하면 된다. 물론 사전에 철저한 공부와 지역조사, 사례연구로 사업 시작 전에 이웃가게를 포함한 완성도 높고 나무랄 데 없는 계획서를 만들 수도 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완성도 높은 계획서는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하기 때문에 실천의 힘이 분산된다. 선택과 집중이 어렵다는 말이다. 완성된 계획서로 실천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완전하게 성숙한 사람이 된 다음에 사랑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평생 사랑을 못 한다. 미숙하지만 지금 수준에서 마음 다해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으로 성숙해지지, 성숙해져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계획과 실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계획서가 완전해야 실천하는 게 아니다. 실천해야 계획서가 완전해진다.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어난다. 내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변화가 없으면 지루해지고, 지루함이 반복되면 무기력해진다. 현장 실무자의 무기력이 늘어나는 이유는 계획 대비 평가의 패턴이 너무 오래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로 잡아도 이제 20년이 넘은 누적된 패턴이다. 무기력을 상쇄시킬 높은 급여와 스트레스를 감내할 최상의 근무환경이 아니라면 일하는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 일하는 재미는 엄청난 게 아니다. 일하면서 하하호호 웃음이 나는 직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웃음이 아니라 힘들어서 실성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헛웃음이다. 일하는 재미는 작은 변화에 있다. 작년과 100% 일치하는 일로는 재미 0%다. 3%, 5%의 변화라도 있어야 한다. 아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조미료 반수 푼이 맛을 바꾸는 법이다. 돌아보자. 올해의 자랑거리, 자랑을 내년도 사업계획에 담자.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시대다.
댓글
댓글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