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밖복지 By 노수현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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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대표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국토가 황폐해진 세계 최빈국 한국을 대표하는 단어는 ‘가난’이었습니다. 자연히 구호는 ‘잘 살아보세’입니다. 굶지 않고 배불리 먹고살자는 뜻입니다. 온 국민이 힘을 합쳐서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단기간의 경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이 되었고 세계 어느 공항을 가도 국산 제품이 있는 세계 10대 무역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전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이 상징적입니다. 영혼을 팔아서 물질을 얻은 것처럼 정신이 피폐해지고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림자가 짙은 막다른 골목길에서 고립을 만납니다.
고립은 시대 언어입니다. 영국의 석학 로리나 허츠는 현시대를 고립의 시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국에는 외로움 부처가 있습니다. 고립이 세계적인 현상이란 것을 말해줍니다. 자본주의가 가진 태생적인 문제입니다. 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는 자본이 사람과 자연마저도 희생시켜서 그렇습니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외롭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즈에서 보여준 통찰처럼요. 컨테이너 벨트에서 주어진 작업만 하루 종일 반복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공장의 일부요, 부속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성을 잃고 외롭지 않은 게 더 이상합니다.
사회적 고립, 고독사가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되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고 종합대책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정부만 그런 게 아니라 지자체별로도 다양한 정책 사업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법과 제도는 선제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늦게 최소 기준을 만드는 게 법과 제도입니다.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실상은 더욱 심각하거나 이미 많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사회적 고립을 정책과제 정도로 이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고립을 이렇게 시대 언어로 각자의 언어로 읽어내면 좋겠습니다. ‘가난’을 화두로 지난 반세기를 지났다면 앞으로는 고립이 대체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현시점에서 사회복지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립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고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립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고립의 정의, 사례, 실태에 집중하다가 고립의 주체를 놓치면 곤란합니다. 고립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고립을 공부하는 것은 음식 재료 없이 요리 기술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재료가 있어야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고립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과 정보화 기술이 앞선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사람 없는 과학기술, 사람 없는 정보화 기술은 무섭습니다. 세계적인 IT 기업들이 인문학을 오히려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직원의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알아야 사람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문학적 학습과 감수성의 기초를 갖춘 사람이 고립 과제를 맡아야 합니다. 고립 과제는 매뉴얼을 따라서 집행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그건 연애를 책으로 배워서 똑같이 실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책을 추천합니다. 책으로만 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책이 아니고서 또 무엇으로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만날 수 없다면 가성비로는 책만 한 게 없습니다. 꼭 인문학 도서만 읽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평소의 관심 있는 분야의 책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으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늘리는 겁니다.
다음으로 고립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고립되어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회문제를 시간으로 구분하면 과거의 사회문제와 현대의 사회문제로 구분됩니다. 과거의 대표적인 사회문제가 빈곤이고 현대는 저출산고령화입니다. 과거의 사회문제는 대부분이 자원의 문제였습니다. 문제와 대상자가 명확했습니다. 자연히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매뉴얼을 만들고 모집으로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사회문제는 매뉴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양상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모집으로 시작할 수 없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실제로 사회적 고립 과제를 맡은 담당자의 가장 큰 고민이 당사자가 없다는 겁니다. 문제의 심각성과 당사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사자가 없는 아이러니를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현수막을 달고 모집할 수도 없습니다.
매뉴얼의 시대가 가고 실천의 시대가 왔습니다. 사회적 고립을 정의하고 사례를 수집해도 내가 맡은 지역사회는 다릅니다.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릅니다. 당사자가 100명 있다면 과거에는 매뉴얼 하나로 족했습니다. 이제는 100개의 매뉴얼이 필요합니다. 결국 실천을 할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과 답이 없다는 한탄의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혼란과 한탄이 사실은 매뉴얼입니다. 경험이 매뉴얼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오르는 산인데 지도마저 없다면 먼저 올라 본 사람의 경험이 최고의 정보입니다. 혼란스럽고 한탄이 나온다면 지금 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생각이 명확하고 자신감이 생긴다면 오히려 의심해 봐야 합니다. 새로운 사회문제를 과거의 문제해결 방식으로 흉내만 내고서 만족하지는 않았는지. 문제를 덮고서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고립을 실천하며 겪은 혼란과 한탄이 좋지는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고 이 길이 맞다면 새로운 관점으로 혼란과 한탄을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프로포절을 잘 써서 자원을 많이 모은 사람이 실력 있다고 인정받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프로그램 계획과 평가를 잘하고 주민 모임을 잘 진행하는 사람을 인정했고요. 지금부터는 고립을 실천하고 경험한 사람, 고립을 실천하면 겪은 혼란과 한탄이 많이 쌓인 사람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고립의 시대, 고립 과제를 경험한 사회복지사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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