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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돌봄의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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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시대마다 주요한 질병이 있다고 했습니다. 철학자의 예리한 통찰입니다. 사회복지 분야도 시대마다 주요한 이슈가 있었고 그것을 대응하는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복지는 구제로 요약됩니다. 지금도 가난의 문제는 존재하지만 구제라는 단어를 널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지난 10여 년의 시간은 마을, 공동체가 핵심어였습니다. 어떤 때는 복지 분야에서도 복지보다 마을과 공동체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회복지 분야를 대표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우선 많이 언급되는 단어를 살피면 좋겠습니다. 대표적인 단어 두 개를 꼽으라면 단연 ESG 경영과 사회적 고립입니다. ESG 경영은 조직 운영 방식으로 복지를 대표하는 단어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사회적 고립입니다. 사회적 고립은 주요한 사회 이슈로 함께 고민할 주제입니다. 사회적 고립이 무엇이고 왜 발생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 고립의 대응 방법으로 관계를 말합니다. 관계는 고립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올바른 방향 설정입니다. 다만 관계는 행복처럼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는 데 사회적 고립 대응과 관련해서는 이전부터 사용하던 적합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돌봄입니다. 사회적 고립에 맞추면 사회적 돌봄입니다.


고립은 최근에 시작된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사회 문제가 빙산의 일각처럼 수면 위로 보인 것뿐입니다. 1945년에 이미 칼 폴라니는 위대한 전환에서 인간과 자연마저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 속성을 간파하면서 고립을 예견했습니다. 긴 인류 역사에서 보면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 자체가 이상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원래 관계를 중심으로 뭉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 관계가 다른 가족과 국가를 해쳐서 문제였지 관계가 부족한 게 문제가 된 시대는 없었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자가 서로 등을 기댄 모습이라고 합니다. 사람 자체가 곧 관계란 말입니다. 나약한 인간은 서로를 돌봄으로써 생존했습니다. 돌봄은 사례관리처럼 새롭게 배워야 하는 기술이 아니란 말입니다. 돌봄은 먼저 생각을 전환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돌봄을 다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돌봄은 생존입니다. 돌봄을 작게 생각하면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돌봄이 아닌 건 아니지만 너무 협소한 해석입니다. 돌봄을 이렇게 해석하면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가 되기 어렵고 작은 실천 기술이 되어 버립니다. 돌봄은 생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말은 태어나서 몇 시간이 지나면 일어서 걷습니다. 사람은 짧아도 일 년이 걸립니다. 엄밀히 말하면 양육자가 돌보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양육자가 돌봐주지 않는다고 섭섭한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돌봄이 곧 생존이란 말입니다.

돌봄을 생존으로 해석하면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돌봄 없이 생존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별적이냐 보편적이냐 이런 논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돌봄처럼 보편적인 복지는 없습니다. 아니 보편적이란 단어로도 부족합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복지입니다. 집의 기초가 있듯이 돌봄은 복지의 바탕이 됩니다.


둘째, 돌봄은 상호의존합니다. 그나마 돌봄이 생존이란 말은 이해가 되는데 상호의존은 낯섭니다. 돌봄을 생각하면 주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양육하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양육자는 주고 아이는 받기만 합니다. 걷지 못하고 목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부모에게 무엇을 준단 말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물질에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현상은 아이가 일방적으로 받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감정은 다릅니다. 아이는 세상에 둘 도 없는 기쁨과 풍요로움을 양육자에게 줍니다. 양육에 이런 감정이 빠지면 기계적 보육이 됩니다. 

또한 양육은 아이에게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사라지면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아도 돼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사라지면 나도 사라집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돌봄을 생각하면 상호의존이란 개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복지는 공급자와 수요자처럼 거래 관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위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수는 있지만 복지의 기초가 되는 돌봄이 되지는 않습니다.


감히 앞으로의 10년, 20년은 돌봄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체 불가능하며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를 살피는 사회적 돌봄입니다. 돌봄이란 단어를 썼지만, 과거의 돌봄과 똑같이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돌봄은 생존이고 상호의존이란 설명만으로도 차이가 확연합니다.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돌봄을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이론을 배우는 학습이 아니라 실천에서 함께 배우는 공부입니다. 돌봄의 시대에 돌봄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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