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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현주 대표] 어제의 기준은 더 이상 오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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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기준은 더 이상 오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기현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대표

 

2016년에 겨울이었다. 당시에 서울시는 청년활동지원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는데, 아마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청년수당이 바로 그 사업이다. 그 해에 청년수당은 복지부의 직권취소 신청으로 1회만에 수당 지급은 중단이 되었는데, 3천여 명이나 되는 청년을 찾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일이 바로 내가 있었던 센터가 하던 일이었다. 그 해에 이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나도 노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져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화의 과정을 겪지 못할 거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은 대체 뭘까? 청년의 시기에 노년을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아주 먼 미래니까 상상이 되지 않는 막연함은 있을지언정, 노인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니.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청년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걸, 청년들이 갖는 불안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는 청년들에게 불안과 위험요인을 더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청년세대 내의 양극화 또한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는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전 지구적 위험을 맞닥뜨리고 있기도 하니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은 사치라는 청년들의 말에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진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청년인구 1230만 명 중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은 절반 수준이다. 경제활동을 하다가 실업한 인구까지 포함하면 10명 중 6명은 일을 하고 있거나, 일하다가 실업했다가를 반복하고 있고, 다른 4명은 취업이나 창업을 준비하거나 학업 과정 중이거나 그냥 쉬고 있는 상태이다. 청년 인구는 줄고 있지만,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청년은 늘고 있고, 청년이 진입하는 일자리는 안정적이고, 경력을 형성할 수 있는 일보다는 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일,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처럼 불안정성이 큰 일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청년들의 불안정한 삶은 일자리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비수도권에 사는 청년들은 수도권 청년에 비해 역량을 쌓을 기회가 갈수록 줄고 있어 청년들의 지역 탈출 러쉬는 가속 페달을 밟은 상황이다. 수저계급론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더라도 청년세대 내 자산과 소득 격차, 그리고 그보다 더욱 심각한 교육과 네트워크의 격차는 부모의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 네트워크, 기회의 다양성 등 사회문화적 자본까지 세습구조 안에 있다는 점 또한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화의 격랑을 청년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맨 몸으로 부딪히고 있다(물론 부모찬스가 있는 청년들도 있지만).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청년들에게 오늘을 희생해서 내일을 꿈꾸라는 명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혈투 끝에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즉 중산층으로 가는 기회의 문을 통과한다면 모를까. 그런데 이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청년은 얼마나 될까? 청년에게 청약통장 혜택을 더 크게 주겠다는 대선 공약은 최소한 청약에 당첨되었을 때, 분양가의 10%에 해당하는 계약금이라도 당장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의 청년들에게만 해당하는 정책이 아니겠는가. 서울의 평균 집값이 9억 원을 훨씬 넘어섰는데, 분양가가 그 보다 적다고 하더라도 당장 수천만 원의 여윳돈을 한 번에 지불할 수 있는 청년(아니 청년 뿐 아니라 다른 세대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은 얼마나 되겠는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을 하고, 전셋집(운이 좋으면 자가로)을 마련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예전의 기준은 청년들에게 좌절만을 경험하게 할 뿐이다. 일의 안정성은 갈수록 떨어져서 먹고 사는 걱정에 몇 개의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에게, 집을 사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내가 사는 게 집이 아니라 방인 청년에게, 연애나 결혼도 선택 사항이 된 청년에게, 예전의 기준은 이미 현재의 기준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양에 따라 사회적 통념도, 정책도 발을 맞춰 변화해야 한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기준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감각은 훨씬 민감하리라 생각한다.

얼마 전 새로운 책 출간을 앞두고 있는 조기현 작가(그는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다)를 만났다. 그는 영케어러(young carer: 젊은 부양자)이자, 영케어러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과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정책을 바꾸는 일을 하는 활동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그를 만난 날은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는 강도영 씨 사건이 기사로 알려지면서 사회적 반향이 크게 일어나던 날이었다. 탐사보도 매체 <셜록>에서 집중 취재한 이 사건을 두고, 언론은 간병살인과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뽑아내기 바빴다. 격랑의 한 가운데에 만난 조기현 작가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영케어러가 몇 명이나 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지에 대해 파악되지 않은 상태임을 지적했다. 복지부는 올해 영케어러 지원을 위한 정책 간담회와 실태조사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영케어러 이슈에서 쟁점은 청년은 근로능력이 있는 연령대이기 때문에, 각종 사회정책에서 지원이 배제되어왔다는 점, 그리고 그 동안 돌봄정책을 부양해 오던 가족 공동체가 무너진 상황에 대한 대처가 없다는 점이다. 가구 구성 중 1인 가구의 수가 최다인 현재, 가족을 돌보는 책무는 누가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책 <액체근대>에서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리는 근대에 대해 말했다.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사회적 기준이 소멸하고, 모든 것이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변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낡은 기준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고 꼬집었다. 보편이니 선별이니 하는 정책 기조의 토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삶이 무너지고 있는 이웃들의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수급자 기준, 보조금 지급 기준, 담당 조직의 책임 기준 등은 변화의 흐름이 보이지만, 변화하기를 저항하는 변명은 아닐지 반성하게 되는 요즘이다.

 

우리는 위드코로나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기준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삶, 반드시 무엇인가 되어야만 시민으로 인정하는 현재의 기준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바우만의 말처럼 액체근대 사회에서 개인화는 갈수록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 조건에서 사회복지 현장은 어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지금의 기준은 동료시민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 어떠한 기준이 현장의 유기적 연결성을 떨어뜨리고 있는가, 우리 삶의 모양을 그대로 담은 사회복지는 무엇일까 와 같은 질문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기준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만드는 것이므로. 또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미래세대의 권리를 훼손하지 않아야 하므로, 지금은 더 치열하게 코로나 이전의 기준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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