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밖복지 By 노수현
- 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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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변화, 경쟁의 가속화, 소득 불평등, 사회 안전망 미흡으로 인하여 ‘고립’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사회복지 현장도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실천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관심과 실천만큼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사회적 고립 과제이다. 심지어 시작의 단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사회적 고립의 깊은 뿌리에 원인이 있다. 뿌리가 깊다는 말은 문제의 원인이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었다는 뜻이다. 사회적 고립은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이다. 밑에는 사회 구조적 문제의 큰 덩어리가 있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대표적이다.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태어났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진화되었다. 그러나 고도화된 자본주의는 인간을 생산의 수단으로 만들고 서로를 협력이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갈수록 인간성을 잃고 사회 구성원이 홀로된 객체가 된 것이 사회적 고립의 뿌리이다. 수영장을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피부병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당장에 피부병은 약으로 치료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수영장을 폐쇄하거나 고쳐야 한다. 사회적 고립은 인간을 생산의 수단으로 만든 사회 구조에서 시작되었다.
둘째, 사회적 고립 대상이 매우 넓고 모호하다. 사업을 위해서는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영리와 비영리 모두 예외 없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은 대상을 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시작을 하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힌다. 전체 가구의 삼분의 일이 1인 가구다. 그렇다고 1인 가구 전체를 잠재적 대상으로 삼기도 어렵다. 복지 현장에서 사회적 고립 과제를 시작하면서 정의와 대상 선정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유이다. 사회적 고립 대상자를 특정하기도 어렵다. 고립되었다는 것은 최소한의 사회적 연결망에서 벗어났다는 말인데, 그런 대상자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라는 말처럼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시작부터가 어려운 과제다.
셋째, 사회적 고립의 해결책이 빈약하다. 취약계층의 복지도 쉽지는 않지만, 자원 부족의 문제이지 방법 자체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은 해결책과 방법이 단순하지 않다. 사회적 고립의 원인이 경제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사회적 고립의 위험이 없는 게 아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항상 고립되는 것도 아니다. 고립은 개인의 기질, 살아온 경험, 환경과 사회 구조가 결합한 복합적인 문제이다. 사회적 고립 대상자를 찾기도 어려운데, 설령 찾았다고 해도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는 게 빈약하다. 기존의 복지 해법이 통하지 않는다. 나오지를 않으니 복지관 프로그램에 참여시킬 수도 없고, 밑반찬 지원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고, 주민 조직에 참여시키기도 어렵다.
위의 세 가지 원인만 살펴도 숨이 막힌다. 그런데 ‘고립’이란 단어가 신경을 더욱 압박한다. 이전에 고립은 주로 뉴스에서 들었던 단어다. 폭우로 지리산 계곡에 고립되었다거나, 태풍으로 섬에 고립되었다는 뉴스 속보의 단골 메뉴였다. 그런 단어 앞에 ‘사회적’을 붙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부담이 된다.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데다가 태풍으로 고립된 사람처럼 극한의 위험에 처한 대상자를 찾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흔히 말하는 고위험군을 찾아서 극한 선택을 막는다면 이보다 더 큰 의미와 성과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낙엽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잡겠다는 말과 같다. 언제 낙엽이 질지 알겠는가? 많은 잎 중에서 어떤 잎이 떨어질지 알겠는가?
사회적 고립 과제의 부담을 줄이고 시작하는 방법으로 ‘고립’ 대신에 ‘외로움’을 쓸 것을 제안한다. 고립의 대상을 찾기는 어렵지만 외로운 사람을 찾는 것은 그보다는 한결 쉽게 생각된다. 극한 고립을 경험하기는 어렵지만 외로움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고 살기 때문이다. 또한 외로움을 생각하면 대처 방법도 떠오른다. 외로운 친구를 생각해보자. 외로운 친구는 엄청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거창한 건 부담되고 귀찮을 수도 있다. 말없이 함께 있어 주기, 밥 같이 먹어주기, 전화 한 통, 문자 한 줄 정도면 된다. 더욱이 이런 소소한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한다면 그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사회적 고립 과제는 장기전이다. 당분간 사회구조가 바뀌거나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새로운 체제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일 년 사업으로, 삼 년 계속 사업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으로 사회복지 안전망이 더욱 촘촘해져야 하고 그때까지 복지 현장에서는 주민 관계망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우리의 빈약한 사회적 고립 대응 경험을 쌓을 때이다. 정책과 전문가의 제안이 있지만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회적 관계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말처럼 너무 문자적이다. 전문가는 그렇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론을 현실로 만드는 실천가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사회적 고립 과제로 분투하는 30여 명의 실무자를 워크숍으로 만난다. ‘분투’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국가도 하지 못하는 일을, 기관도 팀도 아닌 때로는 실무자 홀로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고시원, 오피스텔, 다세대, 임대단지를 가가호호 방문하여 영업사원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문이 열리지 않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 나선다. 사회적 고립 과제는 이렇게 찾아 나서는 자체가 성과이다. 사회적 고립 대상자를 발견하면 더욱 좋겠지만 나간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다. 꾸준히 찾아 나서며 주민 관계망을 조금씩 넓히는 게 성과이다. 현장의 노력이 얼마나 사회적 고립을 줄였는지, 극단의 선택을 막았는지는 수치로 확인되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전문가도 실무자의 자리에서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어떤 결과가 아닌 그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박수받아야 할 때가 있다. 사회적 고립 과제를 맡은 복지 현장의 실무자가 그렇다.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고립 가구를 찾아 나서는 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찾아 나서는 것까지가 실무자의 몫이다. 나머지는 우리가, 우리 사회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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