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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 사회가 원하는 건 ‘공감하는 사회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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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 사회가 원하는 건 공감하는 사회사업가


2022년 한국사례관리학회 춘계학술대회

<현장기반 사례관리 지원을 위한 스마트케어시스템의 개발과 도전> 토론문을 다듬어 소개합니다.




한계와 근본 성찰


사회사업(social work)을 공부하고 사회사업가로 현장에서 활동해왔습니다.

지금도 사회사업 하는 사회사업가들과 공부하며 나누기에,

이번 주제발표와 같은 사회정책(social policy) 이야기는 제게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책과 제도 변화가 사회사업 현장에서 이루어졌을 때

이 일을 직접 마주하고 맡아 이뤄갈 사회사업가들을 생각하며 몇 가지 주제(문제)를 정리했습니다.


‘가난’은 자본주의란 체제의 산물이기에 결코 없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제에 위협이 되는 ‘빈곤’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시작한 ‘관리의 기술’이 이제 첨단 기술과 만났고, 사회사업가의 사례관리 업무에서 논의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국가의 빈자에 대한 관리 기술로써 ‘ICT와 빅데이터의 결합’이 궁극적으로 빈부격차를 없애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는 데 기여할까?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되는 가난을 적극 관리하려는 기술 혁신 정도를 다룰 뿐이며,

완전히 다른 세상(사회)에 이르는 데까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빈자의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이웃이 있고 인정이 있어 살 만한 사회(공동체)를 향하는 사회사업가로서

본 주제와는 ‘이상’에 관한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사례관리학회 학술대회를 통해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합니다.” 하고 이야기한 이번 학회의 초대장 환대 문구처럼,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정책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판인 ‘관리와 통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에 관한 철학적이고 이념적인 성찰이 없는 상태에서 정보통신기술과 빅데이터가 결합한 시스템의 도입은,

미래에 인간성을 잃은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사회사업마저도 한 몫 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지난해 가을 한국사례관리학회 기조강연자 박경현 선생님은 복지국가가 대량생산을 바탕으로 한 공장식 모델로,

이는 현재의 다양한 욕구를 담아내지 못하는 낡은 방식이라며 비판하였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당사자(빈자)를 만나면 그를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리고,

지나가는 물건에 나사를 조이듯 사회복지사가 표준화된 서비스를 연결하는 기계적 진행 방식의 사례관리 업무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수직적이면서 경직되어 있는 조직 구조와, 그 속에서 표준화 된 서비스만을 연결하는 ‘공장식 복지’, ‘공장식 사례관리’.

이런 틀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여기에 정보통신기술과 빅데이터가 결합하는 모양새입니다.


그 많은 재정을 써가며 구축해온 탄탄한 복지제도와 훌륭한 전문가들이 왜 그들을 제대로 돕지 못하는 것인가.

좌파나 우파 모두 더 나은 복지제도를 위해 고심하지만 결론은 ‘돈’에 귀착된다.

더 많은 재정 투입,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에의 투자로는 복잡하고 뿌리 깊은 문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며

이미 낡을 대로 낡은 부대를 계속 꿰매고 덧대는 헛수고일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이제 베버리지식의 복지국가는 수명을 다했다’라고. “Social services are broken.” 

<사회복지실천의 전환: 현미경을 내려놓고 망원경을 들어라> (박경현, 2021년 한국사례관리학회 춘계학술대회 원고)




‘가난’을 문제로 보는 문제


빅데이터와 ICT의 결합이 결국 ‘가난’을 사회 유지와 발전의 걸림돌로 보고,

그래서 이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는 기술 개발이란 의심이 듭니다.

‘빈자’는 누구인가요? 빈곤의 문제를 물질적 가난으로만 보는 시선의 한계가 느껴집니다.

사회사업에서 빈자는 ‘관계가 빈약한 자’입니다. 물질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이웃이 있고 인정이 있다면 경험할 수 있는 ‘사람다움(사회적 역할)’이 한 사람을 살게 합니다.

물질(복지 서비스)은 당장 죽지 않고 생존·연명하게 할  수는 있지만, ‘삶’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완전한 삶, 즉 사람다움은 자기 삶을 살고 더불어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사회사업에서 부자는 ‘관계가 풍성한 자’입니다.

당사자의 인간성을 끝까지 지키고 살리는 사람이 사회사업가라면, 그 인간성의 실체는 자기 삶과 때때로 어울리는 삶에 있습니다.

즉, 인격과 관계가 인간성(사람다움)의 실체입니다.


<현장기반 사례관리 지원을 위한 스마트케어시스템의 개발과 도전>에서 빈자란,

이런 ‘무형의 관계’를 살피지 않고 ‘물질의 결핍’ 혹은 ‘사회가 규정한 삶에서 벗어난 인생’으로 한정하는 듯합니다.

이들은 결국 사회 유지와 운영의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가난한 이들이 모두 복지 서비스나 복지 제도의 대상은 아니지만,

빅데이터를 ICT와 결합한 사회 속에서는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관리의 대상이 되고, 국가는 개입을 시작합니다.

빈자는 이 굴레에서 더욱 빠져나갈 수 없게 됩니다. 자율의 숨통이 조여드는 순간, 서서히 길들여집니다.

국가의 ‘빈곤을 구제해야 하는 의무’란 바탕에서 이뤄지는 기술 통합과 진보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뤄지는 방식에서는 조금 더 궁리할 필요를 느낍니다.

‘서비스의 표준화’라는 말 뒤에는 다양한 삶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그림자가 항상 따라옵니다.

빅데이터와 ICT의 결합 사회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은 존중 될 수 있을까요?


“빈민에 대한 개입이 내포하는 ‘삶의 형식’은 삶의 ‘온전함’을 경제적 측면으로 환원하면서

사회적 연결과 인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또 다른 측면을 고려하지 못했다.

상호돌봄과 관계에 대한 정영희의 욕구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공하는 물질적 지원만으로는 획득될 수 없었다.”

<쪽방촌의 사회적 삶 : 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2020, 정택진,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석사 논문




‘기술 발전’을 실천의 진보로 보는 문제


기술 발전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기술 발전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 사이 관계를 생동하는 사회사업가로서, 특히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다양한 형태의 기술 발전은 고맙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기술은 중립적입니다. 기술이란 마치 칼과 같아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 가에 따라

당사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위협이 되거나 상하게도 합니다. 

바늘은 옷을 수선하고 상처를 꿰맬 수 있지만, 뜻밖에 고문의 도구로써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상과 의도’를 점검하는 일이 먼저일 겁니다.

*돌봄 수단으로 로봇의 등장이 어르신에게 미치는 갈등 상황으로 ‘사회 관계망이 축소’될 거란 우려나,

돌봄 과정에서 ‘노인이 대상화’ 되는 우려, ‘사생활 침해’ 우려 따위를 다룬 글이 있습니다.

(Amanda Sharkey·Noel Sharkey, Ethics Inf Technol, 2012)


또한, 기술 발전으로 얻는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민감하게 살펴봅니다.

이익이 커질수록 사회에 환원하는 게  많아지지 않습니다. 이익을 기반으로 권력을 형성합니다.

기술 권력은 이제 그 기술 사용 비용을 청구하기 시작할 겁니다. 지난 역사가 이를 말해줍니다.

*무료로 제공하였다 보편화 되면 유료로 전환하는 것들을 많습니다.

최근, 구글이 앱 내부 결제 때 수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구글 통행세’


기술의 공공화를 생각하지 않고 기술 발전을 현장의 진보로 쉽게 환영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사회사업 현장도 누군가에게는 이윤을 만드는 시장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사업 현장에서의 첨단 기술 도입과 유지 활용은 누군가에게는 큰 이익이 남는 장사입니다.

‘기술과 관리의 결합’, ‘기술과 자본의 결합’에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기술이 중립이라면,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사회사업가로 먼저 갖추어야 할 것(덕목)은 무얼까요?


코로나19 사태로 세상이 일제히 멈추고 길이 끊긴 지금. 우리는 ‘인간성의 대변형’을 겪고 있다.

서로가 만나고 모이고 나누고 해내며 살아온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인간人間의 길이 끊겨버렸다.

사람이 사람에게 공포가 되고, 조금의 위험과 손해도 거리두기로 차단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접촉의 역사’로부터 역행하는 것은 ‘사랑의 감축’이고 사랑의 소멸이라는 비상사태의 징표이기도 하다.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지만 ‘코로나 이후’란 없다. 더 독한, 더 잦은, 더 다른 코로나의 시대일 것이다.

언젠가는 코로나 저편의 검은 그림자가 드러나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

더 속 깊은 만남으로 나누고 모이고 얼굴을 마주 보며 생생히 살아야 한다.

지구 인류 문명의 정점에서 기습당한 코로나 시대를 기회 삼아, 새로운 철학과 삶의 양식을 찾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길’> (박노해, 느린걸음, 2020)




정보 생성과 축적과 공유 과정에서 당사자가 소외되는 문제


이렇게 정보통신기술이 진보하고, 축적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회 속에서

당사자(빈자)는 더욱 손쉽게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다듬어집니다.

당사자의 ‘자기결정권’과 ‘권익 옹호’라는 한국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의 핵심 주제를 생각한다면,

정보 수집과 축척과 유통과 활용 과정에서 작은 정보도 당사자의 동의와 허락 아래에서 이뤄져야 할 겁니다.

‘인간 중심 사례관리로 전환’을 기대하지만, 이 흐름 속에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인간 중심의 실체는 무얼까요?

사회복지사가 당사자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는 어떤 권한도 없었습니다.

시작부터 당사자의 삶이었습니다. 


빅데이터 접근에 관한 권한이 사회복지사에게만 주어지는 건 위험합니다.

<현장기반 사례관리 지원을 위한 스마트케어시스템의 개발과 도전>에서도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윤리적 의미와 실천 사례’를 짧게 언급했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를 조금 더 깊이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기술을 당장 평범한 사람에게 적용했을 때에 마주할 반응도 상상합니다.

지금 내가 이 정보통신기술과 빅데이터에 기반한 도구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 불편한 마음이 있다면,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하는 일 또한 보다 세심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안전장치 없이 유출되는 정보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크지 않지만,

사회적 약자에게는 때로는 생존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지금도 우리 정보 거의 대부분은 새어 나가고 있을 거란 합리적 의심이 들고 있습니다.

보완에 완벽한 정보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사자를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불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과도하게 수집한 개인 정보가 당사자는 물론, 정보를 수집한 사람조차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는 사회가 될까 두렵습니다.

‘빅데이터’는 정보통신기술이 진보한 사회에서 언제든 ‘빅브라더’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위험을 막는 안전장치는 당사자의 정보 접근과 통제와 조정을 내재화하는 데 있습니다.


소외 집단은 공적 혜택에 접근하거나, 치안 유지가 잘되는 지역을 통행하거나,

의료보험 제도 안으로 들어가거나, 국경을 넘을 때,

더 높은 수준의 데이터 수집 요구에 맞닥뜨린다.

수집된 데이터는 이들을 의심과 추가 조사의 표적으로 삼는 데 이용되면서,

소외 집단의 주변성을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이들 집단은 부적격하다고 여겨져 처벌적 공공 정책과 집중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고, 이런 순환이 다시 시작된다.

이는 일종의 집단적 적신호이자, 되먹임 되는 불평등의 순환 고리이다.

<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북트리거, 2018)




‘늙어감’을 병으로 보는 문제


<현장기반 사례관리 지원을 위한 스마트케어시스템의 개발과 도전>에서 예시로 자주 소개하는 대상은 어르신입니다.

어르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늙어버린’ 존재이고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는 아닐 겁니다.

사회사업에서 어르신은 끝까지 자기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 현장에서조차 어르신은 온갖 복지 서비스의 수혜 대상이란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절대 명제입니다.

하지만, ‘젊음’ 만을 정상 혹은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그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미성숙 존재일 뿐입니다.


또한, 그 경계를 넘고 나면 그때부터는 병들어 간다는 인식의 틀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틀이 노인을 환자로 보는 편견을 만듭니다.

전체 인생 가운데 짧은 청년기만을 완전한 삶으로 보는 시선은, 노인을 잉여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청춘을 절대 기준으로 보는 사회 바탕에는 ‘생산력과 소비력’으로 빈자와 부자를,

비정상과 정상을, 젊음과 늙음을 가르는 시선이 깔려있는 겁니다. 


어르신에 관한 이런 편견이 바탕에 있는 상태에서 등장한 빅데이터와 ICT의 결합이라면,

이 일이 어르신을 존중하고 그래서 끝까지 당신 삶을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노인복지 현장에서 절실한 건 ‘돌봄의 첨단 기술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100세 인생 시대에서 이런 기술의 도입은, 정년 뒤에 남은 수십 년 인생을

돌봄 기술과 돌봄 종사자에게 내 맡기는 객체의 삶으로 연명하게 하기 쉽습니다.


핵심은 ‘청년에서의 해방’입니다.

‘청년’이란 정상 준거를 설정하고, 여기서 멀어져 그만큼의 활력이나 체력을 갖지 못한 것을 병으로 보고,

그래서 치료하고 관리하려 드는 틀에서의 해방입니다.

노인 한 명은 도서관 하나요, 따라서 노인은 우리 사회의 원로입니다.

이런 경험과 지식의 자산을 사회에 나누며 끝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게 돕는 과정을

‘스마트한 케어(돌봄)’라고 말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 삶을 살게 ‘지원’하고, 마지막까지 익숙하게 지내온 둘레 사람과 관계하게 ‘거드는’ 실천 관점의 전환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더디더라도 바르고 우직하게, 기품 있는 사회사업가로 어르신 곁에서 당당하고 싶습니다.


“남이, 힘이 센 자가 시혜로 해결해 주는 것은 복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노인이다 보니 국가와 사회의 노인복지에 대한 요즘시각에 민감합니다.

노인을 부양할 젊은 인구는 줄어드는데 노인인구가 늘어나서 문제라는 것 아닙니까?

젊은이한테 부양해달라는 노인이 어디 있어요. 공동체 시절에 노인은 죽는 날까지 일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1주일 전까지 밭 매셨어요. 뭘 젊은 사람이 보장해줍니까.

오히려 노인들이 죽는 날까지 도시에 사는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있지.

(…) 옛날 공동체에는 한 살부터 90살 노인, 미치광이, 장애인 다 있었어요. 소외시키지 않고 다 감싸고 살았어요.

굶어 죽이지 않고 같이 살았어요. 그게 자치적인 복지죠.” 

<살림의 경제학> (강수돌, 인물과사상사, 2009) ‘참된 복지란 무엇인가’에서 천규석 인터뷰 가운데







사회사업가의 설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는 문제


많은 사회사업가가 보았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에서 주인공은

어려움 속에서 제대로 된 복지 서비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끝내 죽음에 이릅니다.

적절한 서비스는 존재했으나, 당사자는 진보했다는 기술의 사용에 접근이 어려웠던 겁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사자와 복지 서비스 사이에 있는 ‘사회복지사’의 역할입니다.

기계화·자동화 된 시스템 안에서는 사회복지사 또한 기계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관료주의와 자동화의 결합’은 약자를 돕겠다는 사회사업가를 그 일에서 소외시켰습니다.

영화 속에서 선배 사회복지사(?)는 당사자에게 인간적 연민 따위는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즉, 그렇게 하면 ‘데이터가 오염’되는 겁니다. 사회사업가의 덕목으로 여겨졌던 ‘공감’이 쓸모없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한때 미국 경찰에게는 ‘무공감’ 태도가 기본 자세였습니다.

당사자를 서비스 수혜자의 위치에 고정한 채, 욕구를 사정하여 적절한 서비스를 파악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사회복지사.

빅데이터와 ICT의 결합은, 이런 구도에는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진행(처리) 속도 향상과 오류 감소를 위한 기술 개발로 느껴집니다.


지금은 당사자와 자원(복지 서비스) 사이에 사회사업가가 존재하고,

사회사업가의 개인적 역량, 즉 정보 수집과 자원 연결 능력에 따라 상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회사업가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사자가 직접 스마트폰 앱 따위를 통하여 서비스를 파악하고 스스로 신청하여 원하는 자원을 획득하게 될 겁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회복지학과는 이제 어떤 과목을 가르쳐야 하나요?

사회복지사의 주요 과목과 덕목은 코딩 기술과 정보처리능력으로 바꿔야 할까요?

이제 사회복지사는 공공의 빅테이터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 정도의 단순 노무자가 될까요? 


반면, 사회사업가의 일이 더는 ‘복지 서비스를 연결’하는 게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미래는 AI와 공존의 시대입니다. AI와 같은 도구의 발전은 분명 사회사업가의 일에 도움을 줄 겁니다.

사회사업가의 업무 가운데 단순 반복적이거나 숫자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일은 확실히 진보한 기술의 도움으로 줄어들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더욱 당사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일에 써야 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진보한다고 해도 ‘공감’과 ‘애정’의 영역까지는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How AI can save our humanity’, TED. April 2018 : 컴퓨터 과학자 ‘Kai-Fu Lee’는 이 발표에서

미래에 사라지는 직업과 더욱 필요한 직업을 구분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회복지사(Social work)가 등장합니다.

사회복지사는 감정적이고 창의적인 직업으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두뇌와 가슴을 사용하는 일이기에 절대 AI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와 사회사업가를 구별할 수 없고, 결국 사회사업가 자리는 AI로 채워질 겁니다.

이는 우리 일자리가 사라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약자의 그 마음과 모습을 알아주고 품어주는 존재가 사회에서 사라지는 불행한 일입니다.


기술 진보를 생각했을 때 미래 시대 사회사업가가 있을 자리는 ‘공감’의 영역입니다.

‘서비스 연결’의 영역에서 벗어나 본래 우리가 출발했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갑시다.

실천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우정과 환대의 마음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기술 진보 이후 더욱 더 사회사업가는 ‘사람 사이 관계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겁니다.

우리는 우정 인정 사랑 애정을 생동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인형 모습을 한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인형 모습의 인공지능으로 치매 예방? 외로움 해소?? 되묻고 싶습니다.

첫째, 평범한 사람 관계와 꾸준히 이어온 일상을 거드는 게 ‘예방과 해소’에 더 효과적일 겁니다.

둘째, 사람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본 건 아닐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용과 효율로 계산하여 빚어낸 일 같습니다.

셋째, 나와 내 가족의 삶은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다면 다른 이에게도 권하기를 주저합니다.

사회복지사가 벌인 일이라면 서운합니다.

사람 사이 관계를 잇고 인간성 회복을 향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런 기기라도 만들어 보급하려는 진정성을 믿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일에는 순서가 있듯, 사회복지사로서 해볼 만한 일들을 벌인 뒤에 나온 결정이면 좋겠습니다.

내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녹음되어 텍스트로 만들어 쌓여갑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인공지능과의 대화.

오늘 무얼 먹을지 미리 짐작하여 말하고, 무얼 사고 무얼 할지 미리 안내합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이런 사회 속에서 인간은 ‘복지 서비스’를 유지하게 하는 숙주 정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지 산업의 소비자로 추락하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자기 삶을 살아가며 나아가 더불어 살게 돕는 게 진보이고, 그렇게 일상에 녹아드는 게 발전입니다.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임시로 이뤄져 온 복지 서비스가 삶에 스며들어 이제 스스로 만들어 먹고,

이웃과 나누고 함께하며 끝까지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사회복지사의 이상입니다.

복지 서비스는 그대로 놓아두고 그 전달 방법만을 첨단 기기로 활용하는 걸 진보나 발전이라 본다면,

나 또한 그런 시스템에서 탈주하고 싶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나보다 나를 더 잘하는 인공지능 인형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지관 지역복지 공부노트> (김세진, 구슬꿰는실, 2021)





미래일기 (horror : 이 문제들을 성찰하지 못하고 맞이한 미래)


2053년 6월. 한때 사회복지전문서점까지 차렸던 김구슬 씨는 이제 일흔 노인이 되었습니다.

가족 없이 홀로 지낸 지 몇 달입니다. 그래도 사회사업가로 살아온 삶이 있어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려 했지만, 이제 자존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버티고 버텼습니다. 내일 아침을 기대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절박해 졌습니다.

20년 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도 사회복지사를 만나야 하는 일이 생길 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주민센터를 찾아갔으나 이제 그런 일은 집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앱으로 하게 되었다며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스마트폰을 들었습니다.

흐릿해진 눈으로 몇 번의 실패와 인내의 소진 끝에 온라인 방문 상담 신청을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담당 주민센터의 공무원이 찾아왔습니다.

무표정한 그의 손에 아이패드 하나가 들려있었습니다.

가벼운 눈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이것저것 노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항목들을 순서대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건조한 질문 속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모름…” 하고 체크한 뒤 바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아마도 공무원이 되어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는 그렇게 훈련 받은 것 같았습니다.

철저하게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이 객관적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질문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에는 일체 반응하지 않습니다.

간혹 “그런 답은 항목에 없습니다.” 정도를 중얼거리듯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분명 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패드에서 벗어나있지 않아 대화를 한다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혹시 로봇이 아닐까?’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사회복지를 전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민센터에서 왔으니 공무원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을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런 전공이 대학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공감이 필요 없는 시대이니,

사회복지학과는 통폐합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복지행정전산학과’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얼핏 들었습니다.


김 노인도 한때는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 옛날, 대학에서는 ‘공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당사자와 인지적 공감을 넘어 정서적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일할 때는 당사자의 삶과 모습이 어떠하든 그를 ‘개별화’하여 보려 힘썼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모습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도 이웃이 있고 인정이 있으면 그럭저럭 어울려 살아간다고, 어떻게든 서로 기대며 살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확고한 믿음으로 실천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 공감 같은 기술은 쓸모가 없습니다.

노인의 소비 패턴과 활동 동선, 평소 스마트폰 사용 정보와 집안 곳곳에 설치된 센서 반응 데이터,

아침저녁으로 인형로봇에게 내뱉은 말을 텍스트로 만든 정보 따위를 조합하여 깔끔하게 출력한 나에게도 낯선 ‘나란 존재’는,

단지 몇 가지 유형화 된 욕구로 표현되었습니다.

몇 번의 터치로 순식간에 파악한 나도 모르는 나의 욕구는,

저 젊은 공무원의 정형화된 몇 가지 질문으로 사정(assesment)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노인은 특정한 존재로 규정(grouping) 되었습니다.


이제 규범화 된 집단이 받는 규격화된 공통의 복지 서비스를 받습니다.

이것도 드론이 떨궈준다고 합니다.

부피가 큰 것은 복지관이 사라지고 그곳에 생긴 복지 서비스 전용 배달 업체 ‘웰팡’에서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이제 연명은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씁쓸합니다.

노인은 그저 당신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밥에 김치 하나라도 좋습니다. 때때로 함께 먹을 이가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서비스 항목에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2053년 지금, 표준화된 삶이 아닙니다. 


반면, 부유한 사람들은 그 삶의 모습과 사회가 대하는 태도가 20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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