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사유(思惟) By 이두진
- 20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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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탈출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 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아브라카다브라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_메가스터디(2013.03)
미로탈출
근대의 '미로'는 얼마나 빨리 탈출할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출구와 입구가 정해진 미로는 경우의 수를 찾는 알고리즘의 파악이 해법의 가장 큰 관건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우골탑으로 쌓은 상아탑은 미로 탈출의 표식이었다. ‘자수성가의 알고리즘’을 파악하고 노력이 더해지면 미로 탈출을 기대할 수 있었다. 표식은 정해진 해법이다. 견고하고 고정적이며 강력했다. 근대의 자기 기획은 주어진 미로를 표식을 따라 탈출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 출구와 입구가 정해져 있다고 믿었기에 미로는 표식의 선택에 따른 설계가 가능했다. 사회 구성원 다수의 경험은 일반화되었고 해법은 사회적으로 고착되었다. 높은 교육열과 상위 교육 체계로의 진입이 이를 반증 한다.
근대 이후의 시대는 입구와 출구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선택하는 자유인’이라는 개인이 개념적으로 통용되었지만, 그 선택에 포함된 위험 부담은 개인의 이해력과 능력을 넘어선 구조적인 문제임이 간과 되었다. 위험에 대한 대가는 온전히 개인의 치러야 할 의무가 되었다. 자신을 지켜줄 것은 스스로 쌓은 스펙 외에는 없게 되었다. 경쟁이 연대를 대신하게 된 사회, 즉 경쟁 사회가 공동체를 대신하게 되면서 개인은 자기상품성 증진이라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기 계발에 몰두하게 된다. 미로에 대한 공포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만 탈출 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 있다. 그러나 이 공포는 자기 계발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끝없이 자기 계발에 몰두하지만 그에 앞서 미로는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아우성-각자도생
지금 이 시대, ‘평등’과 ‘공정’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 교차지점이 엷어졌다. 오히려 대립적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공정하지 않다'는 아우성은 근대에 미로를 탈출했던 사람들이 제시한 표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분노이다. 오늘날, 다수는 약자이며 소수자가 되었다. 이들, 다수의 아우성은 표식을 만들어온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다. 선택적 분노는 표식을 만들고 드러낸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다. 분노는 경쟁의 규칙이 공정한지에 대한 논쟁으로 표출된다. ‘평등은 공정에 위배 된다. 약자의 출발선을 당겨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와 같은 아우성이 선택적이고 공정하지 않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건 위험부담에 대한 사회적 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위험은 개인의 이해력과 능력을 넘어선다. ‘개인’의 자유적 가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전환되었다.
“우영우가 강자예요! 이 게임은 공정하지가 않아요. 우영우가 약자라는 거 그거 다 착각이에요.”
"우영우가 강자예요! 이 게임은 공정하지가 않아요. 우영우가 약자라는 거 그거 다 착각이에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 7화에서 젊은 세대의 공정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권민우 변호사가 최수연 변호사에게 얼굴을 붉히며 강변한다. 그는 우영우 변호사가 이들이 다니는 로펌 대표와 선후배 관계인 아버지 덕에 취업할 수 있었다며 ‘공정’ 문제를 지적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가 ‘약자’라는 것은 착각이라고 항변한다. 드라마를 통해 봐야 할 것은 특정세대의 기계적 공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극한경쟁에 내몰린 2030세대가 맥락이 사라진 공정담론을 들고 나온 이유이다. 소수가 독점한 넘어설 수 없는 얼음 도가니 밖 사람들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에게 경쟁의 대상은 얼음 도가니에 갇힌 사람들이다. 얼음 도가니 같은 사회에서 불(火)같이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과거 좋은 대학을 보내야 한다는 부모의 욕망은, 진보적인 좋은 대학을 보내야 한다는 부모의 욕망으로 포장된 사회로 바뀌었지만, 지금 이 시대, 선택적 불공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포장마저 벗겨 내었다. “친구가 너의 공부를 대신해 주지는 않아”라는 사교육 광고가 등장했고, “어른들이 너의 우정을 대신해 주진 않아”라는 시민단체의 대항 캠페인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광고 후 십 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우정과 학업 속에서 어디에 더 집중하고 있는가. 어느 캠페인이 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가까운가.
기성 세대는 평등을 위해 투쟁을 선택했다. 오늘날의 세대는 공정에 기반한 경쟁을 선택했다. 진보주의자에게 투쟁 대신 경쟁이라는 이 세대의 태도는 체제의 논리에 순응하는 보수성으로 보이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경쟁은 유일한 선택지이다.
미로에서 벗어나기
표식을 따르지 않는 방법은 미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눈물겨운 보수성은 한시적이라고 믿는다. 모든 젊음에는 저항과 전복의 급진성이 내장되어 있다. 시대의 변곡점에서 이러한 저항 의식은 계속 표출되어왔다. 모든 2030 세대가 미로 속의 현실에 완전히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정을, 추앙을, 환대를 지향하는 수많은 이들에 의해 이 시대가 변혁될 것이라 믿는다. 미로는 탈출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미로는 부정되어야 하고 벗어나야 할 사회적 체체이다. 기를 쓰고 담벼락 위로 올라가야 한다.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끌어 올려주자. 미로에서 벗어나자.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미로 위로 올라가 조감하고, 다시 미로로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자.
사회복지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이들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긴밀한 실천의 현장에서, 느슨한 공론장의 연대로서, 무엇보다 만나는 주민에게서 일상과 삶으로 평등의 가치를 복원하고 회복하자. 경험을 거들고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돕자. 그럼으로서 우리도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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