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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는 없다.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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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혼자 죽는 사람은 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고 축복받지 못하는 여건이어도 혼자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나오지 않고 엄마의 배 속에 있다가 나오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를 잉태한 엄마가 있고 의료진이 있고 밖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 곁에 누군가가 있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다. 하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외로이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을 잘 살펴야 한다. 존엄한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도록 말이다. 마지막 순간이 존엄하지 않으면 한 사람의 평생이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고독사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사회가 관심을 가져서 좋은 일인데 한편으로는 가로수 정비사업처럼 과업 중심으로 흐르는 안타까움이 있다. 고독사를 예방하고 고위험 가구를 찾는 것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할 일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고독사를 줄이고 예방했다고 말하지 못한다. 고독사는 빙산의 일각이다. 빙산의 깊은 곳에는 효율이라는 거대한 암초가 있다. ‘효율’은 자본주의의 구호와 같다. 자본을 위해서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는다. 심지어 인간과 자연마저도 말이다. 거대한 전환의 칼 폴라니는 반세기 전에 자본주의의 심각한 폐해를 꿰뚫고 경고했다.


칼 폴라니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돈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년 노동자가 쇳물에 녹아져도, 반죽기에 팔이 빨려 들어가 못다 한 생을 마감해도 돈의 논리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동안 사회복지는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보다는 시스템이 만든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했다. 복지국가 담론에 반대하는 이유는 결국 시스템의 변화보다 잘못된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는 문제 인식 때문이다. 복지국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복지가 자본의 수단이 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특히 복지 실천의 최전선에 있는 사회복지 기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기 어렵다. 당장에 해결할 문제가 쌓였고 정책화된 복지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사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고독사 이슈만이라도 과업이 아닌 사회복지의 본질을 묻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철학적 탐구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진 ‘효율’의 습성을 흔들어라도 보자는 말이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북극을 가르키는 나침판의 떨림을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는 상태로 묘사했다. 그래서 나침판의 끝이 떨리면 방향을 믿어도 좋으나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의심하고 심지어 나침판을 버려야 한다고 일갈한다. 고민이 문제가 아니라 고민도 없는 상태가 문제란 말이다. 고독사에 적용하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다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그런 고민마저 없고 확신까지 든다면 자신의 방법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흔들고 흔들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거대한 해일 앞에선 작은 한 인간처럼 자본주의를 거스르기는 어렵다. 이미 익숙해졌고 자본의 많은 편리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고민마저 하지 않고 떨리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효율을 추종하고 앞서서 외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고립과 고독사 예방 사업의 방법론을 찾기 전에 질문을 던지고 흔들려 보자. 고독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래도 효율을 옹호하고 끝까지 가봐야겠냐고. 사실 말부터 잘못되었다. 고독사는 없다. 고독한 관계,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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