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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특집] 아빠, 친구 관계는 어디서 가르쳐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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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친구 관계는 어디서 가르쳐주나요?




친구 관계를 배울 수 있는 ‘놀이’


“공부보다 어려운 게 친구 관계예요. 친구 관계는 어디서 가르쳐주나요? 어디 가면 배울 수 있나요?”

어느 초등학생의 질문입니다.

공부 알려주는 학원이야 널렸지만, 인간관계를 경험하며 마음의 근육을 만들 친구 사귀는 법은 정말 어디에 가야 배울 수 있을까요?


친구관계를 배우려면 놀아야 합니다. 또래와 어울리며 사회를 배울 수 있는 게 ‘놀이’입니다.

놀이는 사람과 관계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집밥만큼 중요한 놀이밥을 먹어야 합니다.

놀이밥은 몸과 마음을 모두 살찌웁니다.

‘놀이’는 사람 사이 관계를 배우는 기회입니다. 사람 사이 어울림에 관심이 있는 사회복지사이기에 여기에 주목합니다.

풍성한 인간관계가 우리 삶의 저력이라면, 그런 관계를 맺는 기회와 방법을 터득하는 ‘놀이’를 어릴 때부터 흠뻑 누리게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놀이’를 게으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신나게 놀수록 죄책감을 들게 합니다.

놀지 못한다는 건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다는 뜻이고, 결국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놀이를 빼앗겨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이끌어갈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다가올 미래가 두렵습니다.



… 왕따는 타고난 결대로 놀지 못해 더는 견딜 수 없는 아이들이 살려고 만들어낸 처절한 놀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펴는 무성한 왕따 논의는 가망 없는 짓이다.

(…)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를 놀이와 우정을 제쳐두고 푸는 길은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이라면

부디 유아 시절부터 아이들을 빼돌리지 말고 충분히 놀 수 있도록 ‘놀 틈’과 ‘놀 터’와 ‘놀 동무’를 찾아주자.

(…) 아이들이 경쟁해서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것에 아직도 마음을 접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당신은

여럿이 괴롭히기나 왕따, 그리고 학교폭력 그리고 아이들의 세상 버리기의 첫 번째 공모자일지 모른다.

(…) 게임과 SNS는 어찌 보면 우정에 굶주린 아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인지도 모른다.

(…) 아이들 대신 놀아주는 연예산업, 노는 착각에 빠트리는 게임,

텔레비전 속 가수의 옷과 운동선수의 돈벌이에 열광하며 아이들의 뇌는 녹아내린다.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대부분의 아이들은 놀이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사이로 대답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30분도 안 된다는 대답을 할 정도로 놀이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놀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유놀이 시간의 현격한 감소가 아이들의 사고력과 감정 발달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 요즘 아이들이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고 충동을 억누르는 자기규제 능력이

예전에 비해 크게 떨어진 원인을 훈육이 아닌 놀이시간 부족에서 찾고 있다.

[초등성장보고서]


… 어렸을 때 놀았던 힘을 꺼내 오늘을 살고 있음을 그대는 알고 있나요.

(…) 그대 또한 놀이가 키웠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소꿉]






사람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이 같은 사람의 본연을 배우고 느끼게 해주는 게 놀이입니다. 놀이는 어울리는 구실입니다.

어릴 때 놀았던 놀이를 떠올립니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 박기, 망까기, 말타기, 짬뽕…

어린 시절 놀이 가운데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여럿이 어울려 놀면서 친구를 사귀었고 규칙을 배웠습니다.

승리의 짜릿함, 패배의 좌절감 같은 여러 감정도 경험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즐기던 놀이는 ‘오징어’였습니다.

이 놀이를 하려면 아이들을 두 편으로 나누는데 한 편이 열 명, 적어도 스무 명이 모여야 가능했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함께했습니다. 그 시절, 놀이가 학교이고 친구가 선생이었습니다.



… 인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많이 만난다.

우리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아도 동네에서 몸이 성한 아이거나 불편한 아이거나 함께 놀았던 기억이 많다.

뛰고 구르고 내닫는 것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구슬치기나 딱지 따먹기, 공기놀이 따위는 얼마든지 함께 놀 수 있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몸이 불편한 아이가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꾸 어울리다보면

그 아이를 배려하는 규칙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놀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물론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규칙성을 익히고, 표현력, 성취감, 문제해결력, 창의력과 집중력 등을 얻을 수 있다.

또 여럿이서 놀이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진정한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일 뿐,

그 어떤 누구도 강요하거나 교육을 통해 주입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놀이를 한다’는 것은 ‘함께한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양보도 할 줄 알아야 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고, 배려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론 상대와 경쟁도 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도 해야 된다.

놀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훗날 아이가 커서 사회에 나갔을 때도 한 번 겪고, 행해야 하는 ‘생존의 기술’이다.

따라서 ‘놀 줄 모른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생존의 기술을 모른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즐겁고 행복하게 놀 줄 안다는 것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놀이의 반란]




좋은 아빠는 친구 같은 아빠??


프렌디 Friendy ; Friend+Daddy, 말 그대로 친구 같은 아빠를 뜻합니다.

바쁜 직장 일로 육아에서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아빠들이 이제 육아뿐 아니라 집안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아빠의 육아 참여가 아이의 정서 함양, 사회성 발달, 올바른 성 역할 습득 따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속속 발표되면서 아빠들은 더욱 적극적입니다.


엄마의 놀이가 ‘학습, 두뇌발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면,

아빠의 놀이는 ‘재미’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아이는 아빠와의 놀이에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이로 인해 상상력과 창의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로 신체놀이를 하며 에너지를 쓰는 아빠 놀이는 아이의 사회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빠가 활발하게 놀아준 아이는 사회성이 좋고, 더 적극적이며, 공격성을 자제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놀이의 반란]



제가 경험한 아버지 모습은 대체로 무뚝뚝하고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시고 휴일에도 일하시니 무언가를 함께한 경험이 없습니다.

가끔 아버지와 집에 있을 때면 낯설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세대가 아빠가 되었습니다.

자신은 경험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따뜻한 관계를 아이와 갖고 싶어 프렌디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8년 복지부에서 주최한 한 어느 행사에서 ‘프렌디’로 선정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네 살 아이와 재미나게 놀았던 이야기를 블로그로 나눴는데, 다른 이들에게 흥미로웠나 봅니다.

저는 아이와 ‘놀아준 것’이 아니라 함께 놀았을 뿐입니다.

제가 어릴 적 재미나게 놀았던 놀이를 다시 해보거나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을 아이를 구실삼아 누렸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즐겁게 노는 일에 관심을 두면서 자연스레 이런 책들에 이르렀습니다.


프렌디가 주목받는 사회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람 관계가 가족 중심으로 오그라들고 있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어울려 살았던 마을문화가 사라지고 원자화된 개인들이 주변과 관계없이 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아이를 양육하면서 만나는 어려움 또한 혼자 헤쳐 나가야 합니다.

믿고 맡길 이웃도 없고 함께 어울려 뛰놀 친구와 골목이 사라진 현실, 이제 남은 건 아빠입니다.

프렌디는 이웃 관계가 사라진 사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며 등장했습니다.


시대에 맞춰 아버지의 모습과 역할이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양성평등 주장의 결과이거나, 남성의 육아 참여와 아빠의 양육 태도가 자녀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크다는 연구가 많아진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도 남성은 육아에서 예절이나 품성 교육 등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또한, 마을에서 함께 길렀습니다.

20대에 방글라데시와 타지키스탄에서 각각 반년 넘게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현지인 집에서 하숙하며 지냈는데, 그때 그 마을들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이들은 온종일 밖에서 뛰어놉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장난감이 없어도 동네 모든 곳이 놀이터였습니다.

어린아이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나름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각자 집안일을 할 수 있는 만큼 나눠 맡았습니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일하며 그 시간을 통해 유대감을 느꼈고 그것이 교육이었습니다.

집안 어른의 일을 흉내 내는 게 최고의 놀이였습니다.

살아가며 필요한 기술의 대부분을 이렇게 노는 가운데 자연스레 터득했습니다. 놀면서 삶을 배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놀이를 꼽으라면 나는 어른들이 제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옆에서 아이들이 보거나 따라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놀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아이들의 가장 좋은 놀이터는 어른들의 일터랍니다.”  [소꿉]





오히려 지금과 같은 불안사회가 부모 모두를 일터로 내모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프렌디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울릴 친구가 없고 왕래하는 이웃이 없으니 아이들은 더욱 부모에게 매달리고,

이를 전통적으로 혼자 감당해왔던 엄마는 아빠에게 부담을 나누자며 ‘프렌디’가 되어달라고 요구합니다.

아이들은 어울릴 또래 친구가 없어 부모에게 매달리고,

부모들은 놀 거리가 부족하니 장난감, 텔레비전, 스마트폰, 전자게임에 의존합니다.

혼자서 온종일 보낼 수 있는 놀이는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는 목적과 과정 모두 관계에 바탕을 둡니다. 어울려 노는 게 진짜 놀이입니다.


때에 맞게 마음껏 놀지 못한 아이는 몸은 자랐어도 그 속의 인격은 왜소해집니다.

아빠가 아이와 노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빠와 놀기를 좋아하고 잘 논다고 해도 아빠는 쉴 새 없이 놀이를 구상해야 합니다.

힘에 부치기도 합니다. 아이도 마냥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빠가 놀아줘야 하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끼리 있으면 상황이 다릅니다.

제 아이의 유년 시절을 보니 또래 친구가 있으면 돌멩이 하나, 나뭇잎 하나만 있어도 온종일 즐겁게 놉니다.

신나게 잘 놉니다. 그게 아이들입니다. 아빠들은 한 시간만 ‘놀아주고’ 나면 더는 버틸 기력이 없습니다.

아이가 친구와 노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펼쳐진 이불, 굴러다니는 신문지, 다 먹은 과자 봉지가 모두 장난감으로 변합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아이들이 어울려 놀 수 있게 주선하고 거드는 일이야말로 아빠의 역할이다!’

아이와 잘 놀아주는 아빠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빠가 친구를 대신하여 프렌디가 되는 사회는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친구 같은 아빠? 친구와 어울리게 하는 아빠! 다들 이런 마음일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 나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회복지사, 특히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동네를 두루 다니며 이런 모임을 제안하면 좋겠습니다. 

가까이 사는 아빠들끼리 친해지면 좋겠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도 괜찮습니다.

때가 되면 아빠들이 다양한 놀이를 제안하거나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를 만듭니다.

만약 세 가정의 아빠와 아이들이 모인다면 여섯 명입니다. 여섯 명이면 어떤 놀이든 해볼 만합니다.

여러 사정으로 집에서 혼자 있는 아이들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아빠 한두 명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거드는 모습을 상상하면 설렙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아이들에게 이만한 선물은 없을 겁니다. 


2011년 1월, ‘구슬꿰는실 복지관 사회교육사업 연수’에서도 이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사회교육사업을 구실로 이런 놀이 활동을 프로그램으로 개설하거나,

인근 초등학교 방과후교실에 복지관이 놀이 수업을 들고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아야 합니다. [소꿉]


… 요즘 아이들한테서 도무지 이런 생기를 마주하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공부하고 남는 시간을 게임에 다 쓰고 밖에서 뛰놀지 않는데,

어떻게 땅과 자연이 주는 생기를 몸에 담을 수 있겠는가.

(…) 일찍이 아이들의 손과 발을 요즘처럼 굼뜨고 둔하게 한 시대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이 아이들에게 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편리함이 단 하나의 가치인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도시의 좁은 공간에서 놀아야 하니 혼자일 수밖에 없고, 혼자이니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기껏해야 건전지로 움직이는 장난감과 게임기, 컴퓨터이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소꿉> 속 사진, 네팔 어린이 (편해문)





진짜 놀이는 아이가 주도하며 여럿이 함께할 때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게임 중독인 아이들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았는데, 별것 없습니다.

게임 중독 캠프에 참여한 아이들이 서로 몸으로 어울려 놀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땀 흘리며 놀았습니다. 며칠 그렇게 노니 자연스레 스스로 인터넷을 조절합니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웃고 떠드느라 거의 컴퓨터를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진짜 재미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 게임이나 스마트폰을 직접 건드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당사자를 특별한 문제를 가진 치료 대상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고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만 문제가 있다는 듯, 아이에게 혐의를 씌우고 아이만을 치료하려 드는 걸 경계합니다.

대체로 이런 일은 부모와 이웃 같은 둘레 사람의 관심이 이렇듯 절실한데,

그런 관계에서 아이만 따로 떼어 전문 치료 프로그램으로만 도우려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초등성장보고서’를 보니, 우리나라 초등학교 5·6학년 학생의 57.1%가 저녁 7시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답니다.

놀 시간이 없는 아이들, 그나마 스마트폰이라도 해야 숨을 쉴 수 있답니다.

스마트폰도 친구와 소통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친구와 마음껏 뛰어놀 환경을 주면 스마트폰을 손에서 잠깐도 내려놓지 않던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과도한 학습에 포위된 상황을 내버려 둔 채, 아이들만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놀 친구와 놀 시간과 놀 거리(재료)’가 있으면 컴퓨터나 스마트폰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회복지사의 관심은 ‘친구와 시간과 거리(재료)’와 같은 강점에 있습니다.

[복지관 사례관리 공부노트] (구슬꿰는실)



… 그때도 부모님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부모들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 그렇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자기 엄마 아빠의 고통과 아픔에 요즘 아이들처럼 사로잡힐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틈만 나면 마당과 골목에 쏟아져 나오는 동무들과 누나 형들과 놀기에도 시간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다.

해가 빠지면 어머니 손에 잡혀와 밥 먹고 몰래 나가 캄캄해지도록 놀다가 돌아오면 코 골며 잠자기 바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거의 그랬다.

(…) 또래 세계와 놀이터는 온통 위험과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차지해 버렸다.

부모에게 너무 의지하며 자라고 조금 더 자라면 컴퓨터에 빠져버린다.

이 모든 것이 놀이가 없기 때문이라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 할까. 


… 에리히 프롬은 만약 아이들이 병들었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마음껏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했다.

그 사이 인터넷 게임은 아이들 영혼을 소리 없이 갉아먹어 들어가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게임에 매달린다.


… 컴퓨터 게임이 지닌 선정성, 폭력성을 따져 아이들에게 해로움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은 별 소용없다.

선정성과 폭력성을 앞세우는 일은 게임의 해악이 무엇인지 모르게 물을 타는 것이다.

게임이 무엇이 무서운지 진정 모른단 말인가. 정말 무서운 것은 게임에 가까워질수록 동무와 형제와 부모 같은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 사랑한다는 것, 가슴 아프다는 것, 힘들다는 것, 눈물겹다는 것, 관계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점점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어려서부터 밖에서 몸으로 논 아이들은 게임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 만약 아이가 게임에 깊이 빠졌다면 그 아이는 평소에 놀지 못했거나 부모들이 놀지 못하게 하였던 아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 나는 컴퓨터게임이 가진 폭력성에 그다지 큰 걱정의 무게를 두지 않는다.

폭력성을 이야기하다 보면 더욱 중요한 폐해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은 그런 데 있지 않다.

게임의 세계에 온전히 빠지면 아이들은 세상의 많은 것에 관심을 끊는다.

인간이 느끼는 이러 저러한 사랑, 우애, 슬픔, 연민 등등의 감정에 그만 무심해진다는 말이다.


… 결핍된 것은 주의력이 아니라 놀이다.

(…) 주의 집중을 못 한다고 이런저런 장애 이름표가 따라붙기도 한다. 여러 말이 많지만,

놀 수 없어 고통 받는 아이들의 답답한 속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드러난 행동만을 따지는 방향으로 쏠리는 흐름과 제약회사의 상술 그리고 부모들의 부족한 관심에 힘입어 혼란이 커지고 있다.

(…) 아이들이 지금 무엇인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증세와 처방에 빠지기보다는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마음껏 놀면서 지냈는지 먼저 살펴야 마땅하다.

(…) 감히 말하건대,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들을 판단하고 진단하고 처방하는 우리 어른들이 먼저인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은 주의력이 아니라 그것은 분명 놀이이다.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제발, 우리 아이들을 숨 쉬게 합시다.

스마트폰, 왕따, 자살… 친구들과 어울려 놀게 하는 데 이 문제들의 실마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회복지사마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킨다? 개천에서 용 나게 도와야 한다?

용이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기에, 그 세상이 바르고 마땅한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개천을 벗어나 용이 사는 세상에 들어가기만 하면 잘 도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회복지사는 더불어 살게 돕는 사람입니다. 경쟁이 아닌 공생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부모와 교사마저도 친구를 밟고 올라가라고 할 때,

우리 사회복지사라도 친구를 경쟁 대상이 아니라 우정을 쌓는 존재로 여기게 돕길 간절히 바랍니다.



더하여, 이런 놀이를 아이들이 상상하고 이뤄갈 수 있게 거듭니다.

아이들이 이루고 부족한 만큼 둘레 사람에게 직접 부탁하게 돕습니다.

… 놀이 속에 있는 모든 아이가 주인 노릇을 할 때 그것이 놀이다.

놀이라는 것은 대부분 혼자 할 수 없고 함께 한다.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 아날로그의 품을 팔지 않는 디지털은 휘황한 껍데기이고 거짓말이고 환영일 뿐이다.

(…) 놀이는 모름지기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며, 하면서 즐거워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가만 두면 재미있을 것도 부모님, 선생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 되면 놀이는 어느새 일이 되어버린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특히 아이가 주도하는 놀이는 지능적, 신체적, 사회적, 감정적 안정을 촉진시킨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인간관계를 배우고 그 속에서 양보와 협상, 갈등상황을 해결하는 능력을 배운다. 

… 적극적으로 놀이를 개발하기보다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단순한 소통이나 게임 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이들은 창의적 활동을 방해한다. 실제로 수십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내면서

그 속에서 관계를 맺고 동시에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을 때우고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으로만 놀이가 활용되고 있다.

놀이문화의 쇠퇴는 문화의 위기이자 나아가 인간성의 위기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초등성장보고서]






아이를 키우며 만약 누군가 이런 만남을 주선하고 활동을 제안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 하는데 대도시에서는 그런 친구를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찾는 일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주선만 해 준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겁니다.


“공부보다 어려운 게 친구 관계예요. 친구 관계는 어디서 가르쳐주나요? 어디 가면 배울 수 있나요?”


가까운 복지관을 찾아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복지관은 사람 사이 관계를 생동하는 곳이라고,

그곳에서 펼치는 다양한 놀이와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면 배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안내하고 싶습니다.


강감찬관악종합사회복지관은 지역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각 동 단위로 팀을 만들어 마을 깊숙이 들어가 일합니다. 모든 동에 어린이 놀이 동아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와 여행을 기획하여 이루고 누립니다. 부족한 만큼 마을 사람들이 거듭니다.

마을이 아이를 키우고, 아이가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복지관의 미래 희망을 여기에서 찾습니다.

*아이들이 만든 여행 안내서 [웃으면서 떠나는 여행] (구슬꿰는실, 2021) 참고.


아이들과 부모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다양한 놀이를 제안하는 일.

이 일로 아이들의 주체의식과 공동체의식을 길러내는 일. 사회복지사가 나서주면 좋겠습니다.



<웃으면서 떠나는 여행> (김별 외, 구슬꿰는실) - 아이들이 친구들을 위해 만든 여행 안내서


<웃으면서 떠나는 여행> 가운데 




… 서울의 한 초등학교는 중간놀이를 시행해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던 아이들이 중간놀이를 통해 교우관계가 부쩍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이다.

(…) 등교할 때 오늘은 뭘 하고 놀지 계획을 세우는 일이 많아지고 친구들과 의논하는 과정을 통해 교우관계도 좋아진 것이다.

(…) 3주차가 되자 고학년 아이들에게서 보이던 내외가 사라지고 한 학생이 가져온 긴 줄을 이용해 다 함께 줄넘기를 했다.

(…) 교사는 고학년일수록 생기기 쉬운 패거리 문화가 놀이를 통해 사라졌고

무엇보다 소극적인 아이들, 자칫 왕따 위험이 있는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초등성장보고서]



이 글을 함께 읽고 나눈 어느 사회복지사가 들려준 시인 제페토의 시 [그 쇳물 쓰지 마라] .

그는 온라인 기사에 시로 댓글을 쓰는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절이 지나고 다니는 학원 수가 더 늘었어요’란 기사에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우리 반 십육 번 

박정호가 죽었네

영어학원 건너가려다 

뺑소니를 당했네

레커차 달려오고 

경찰차 달려오고

사이렌 시끄러워도

그 아이 텅 빈 눈은

먼 하늘만 보았네

박정호가 죽었어요

훌쩍대는 전화에

울 엄마는 그 아이

몇 등이냐 물었네





아이들이 자기 몫의 외로움과 절망감을 가방에 짊어지고 늦은 밤까지 학원 사이를 배회하는 우리 사회.

다양한 사람과 놀아본 경험이 없는 이런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결코 약자와 더불어 살아갈 리 없습니다.

약자도 살 만한 세상은 만들지 못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삭막한 사회 속에서 또다시 무엇가로 경쟁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낼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놀이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장사꾼들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놀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관계와 관심과 사랑과 우정이 빠지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오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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