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관 사회사업 By 김세진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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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사회와 사회복지 : 1부 외로움 2_복지 서비스로 이룰 수 없는 것들
복지 서비스로 이룰 수 없는 것들
전통적인 사회복지 실천은 인간의 욕구에 바탕을 두어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왔습니다.
이제 그런 실천의 한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필요한 욕구가 채워지면 또 다른 욕구로 마음이 옮겨갑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나면 맛있는 음식을 또 먹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욕구가 다를 곳으로 넘어간 겁니다. 이것이 욕구의 기본 생리입니다.
나라와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에는 원초적 생리인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습니다.
이를 복지 서비스로 지원하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역사회에 물질의 궁핍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다른 욕구를 생각할 때입니다.
생존하고 연명하는 데에서 ‘인격과 관계’를 바탕에 둔 ‘인간다운 삶’을 이루고 누리게 거드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물질은 차고 넘치는데 인격은 왜소해지고 관계는 쪼그라들었습니다.
물질이 풍부하면 잘 지낼 줄 알았는데 정신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굶어 죽지는 않아도 외로워 죽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간혹 굶어 죽는 이가 있다고 해도 이는 ‘관계의 문제’이지 절대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복지관이 물질을 채워주는 ‘서비스’만을 붙잡는다면, 이는 이상을 잘못 설정한 겁니다.
심리학자 매슬로는 <매슬로의 동기이론>(유엑스리뷰, 2018)에서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눴습니다.
생리, 안정, 애정(사랑), 자존, 자아실현, 이 다섯 가지 욕구가 있어야 인간의 긍정적 성격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복지 서비스’는 이 다섯 욕구 가운데 ‘생리’와 ‘안정’은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그 이상의 상위 욕구를 충족할 수 없습니다.
생리와 심리가 함께 나아져야 완전한 삶이 되는데, 생리만 다스리는 복지 서비스는 사람의 긍정적 변화에 한계가 있습니다.
심리, 즉 애정과 자존과 자아실현 욕구는 모두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생리 욕구만을 채워서는 인간적 삶의 완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복지 서비스에 골몰하는 복지기관이 적지 않습니다.
더욱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서비스를 만들어 더 깊숙이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서비스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정과 인정, 사랑과 애정, 성취와 보람, 존재와 자존… 그 어떤 복지 서비스도 이를 살필 수 없습니다.
생존·연명 너머 ‘삶의 완성’을 이루는 바탕에는 이런 것들이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함께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깊어가는 시대, 때때로 함께할 누군가를 주선하는 일을 사회복지 핵심 사업으로 붙잡아야 하는 때입니다.
이웃 동아리는 환경도 생각하게 하는 기회
바쁜 일상을 살지만 공허하기만 합니다. 물질은 분명 전보다 몇 배 풍요로워졌는데 사람들이 생기를 잃어갑니다.
삶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현대인은 무언가에 ‘중독’될 정도로 몰입합니다.
얼마 전까지 사회사업 현장에서 만나는 중독이 ‘술’ 정도였는데, 지금은 물건 게임 동물 집 차 주식…
일상 속 여러 영역에서 문제 수준의 중독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몰입 대부분이 소비로써 이뤄지다 보니
구매력 강화를 위해 더욱 ‘화폐’에 집중하게 됩니다.*
(*과잉 소비는 환경 파괴와 연관이 깊습니다. 코로나19가 환경재해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분명한 경고입니다.
이제 덜 쓰고 덜 만들어야 하는 게 인류 미래의 비전입니다.
소비와 생산을 줄이는 바탕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온 삶을 화폐에 몰입하니 인간관계는 더욱 좁아지고 점점 더 고립됩니다. 또 다시 외롭고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다른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미래는 두렵고, 또다시 화폐를 쫓고, 이런 악순환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참담한 상황에 갇힌 개인은 서서히 자아가 분열합니다.
둘레 사람과 단절된 채 홀로 지내면서, 결국 자신과도 단절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번 돈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타인과 단절 속에서 고립된 개인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공허함 속에서 끝내 자기와도 단절됩니다.
고립 속에서 혼자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으면, 오직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돈만 좇거나,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며 연명하거나. 고립된 채 우울이 깊어지고 이것이 바닥에 닿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안으로 향하면 ‘스스로 삶을 마감’, 밖으로 향하면 ‘묻지마 폭력’.
돈을 번다고 해도 그 과정에 도덕과 윤리가 있기 어렵고, 긁어 모은 돈의 사용도 폭력과 과시와 조롱이 담기기 쉽습니다.
이런 돈은 내 삶과 함께 다른 이의 삶도 무너지게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자연환경과의 어울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기 화폐 증식에만 골몰하는 이는 수단 방법을 가리 않습니다.
둘레 사람도 자본의 도구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자연환경은 오직 개발의 대상일 뿐입니다.
돈도 없고 둘레 사람도 없는데 뭇생명이 귀하게 다가오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겠고, 타인은 더욱 모릅니다.
자기를 살피지 못하고, 둘레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에게 자연환경 문제는 다른 세상의 일입니다.*
(*땅과 멀어진 인간. 자연환경과 단절되어 살아왔기에 둘레 사람을 잊고 스스로 무너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코로나19’도 그저 새로운 사업 투자의 기회였습니다.)
타인과 단절, 환경과 단절, 끝내 자기와 단절…
이런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게 ‘자기를 돌아보는 공부’일 겁니다. 세상을 조망하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는 혼자서 이뤄가기 쉽지 않습니다.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찾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때,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화폐만을 향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아주 작은 틈이라도 있다면 변화는 시작될 겁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하여 폭주하는 기차에서 앞이 아닌 옆문으로 내릴 때는 용기와 함께 같이 걸을 ‘동료’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도 타자와 만남 속에서 빚어집니다.
늘 함께하는 ‘가족’이나 ‘계약 관계로 만나는 정도’의 관계.
이런 연결이라도 있어 고맙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긴장이 바탕에 깔린 공적 영역을 벗어나
잠깐이라도 인사하거나 때때로 함께 떠들고 웃고 먹고 마실 가족 외의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열쇠, ‘공동체’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지역사회의 무엇을 보는가?’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사람들의 어울림’을 생각합니다. 더불어 살게 돕고 싶습니다.
종종 ‘주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다음 질문입니다.
‘무엇을 문제로 보는가’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사람들 사이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문제로 봅니다. 일상이 무너지고 있음을 문제로 여깁니다.*
(*교통, 환경, 주거, 쓰레기, 범죄, 소득…. 우리 지역사회 이런 문제를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체성이 없다면 모든 일을 다 해야 할 듯합니다. 모든 일이 다 중요해 보입니다.
어떤 것을 문제로 보느냐? 우리가 누구인지 먼저 생각한다면 풀릴 질문입니다.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더불어 살게 돕는 사람입니다. 사회복지사의 이상은 ‘이웃과 인정’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관계’를 답합니다.)
건강한 개인이 모인 공동체는 건강할 겁니다. 자기 삶을 살고, 둘레 사람과 더불어 사는 개인을 생각합니다.
‘공동체(모임, 조직)’를 목적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공동체’를 건강한 개인을 위해 필요한 수단(도구)으로 여깁니다.
자기 삶을 살아가고, 때때로 기댈 공동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관심 있는 주제로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어울리는 느슨한 공동체가 많다면, 일상이 풍요로울 겁니다.
좋은 공동체가 있으면 일상을 관조할 여유가 생기고, 성찰할 힘이 만들어집니다.
자기 삶을 살고 때때로 어울려 사는 삶,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모인 지역사회. 이를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거들면 좋겠습니다.
환경이 마음을 지배합니다. 환경 가운데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사람입니다.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가가 행복감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회적 관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 생각 이상입니다.
둘레 사람이 나에게 주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직접 연결된 사람(친구)이 행복할 때 당사자가 행복할 확률은 약 15% 더 높아집니다.
행복의 확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친구의 친구)에 대한 행복 확산 효과는 10%이고,
3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친구의 친구의 친구)에 대한 행복 확산 효과는 약 6%였습니다. 4단계에서는 그 효과가 거의 사라집니다.
즉,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한 사람 곁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복된 삶을 원한다면 그런 뜻을 좇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 우울한 사람, 냉소적인 사람과 자주 만나면, 나 역시 불행하고 우울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될 확률이 커집니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는 공적 관계를 조절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골라 교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적 관계에서라도 적극 좋은 사람과 함께하려 애씁니다.
공적 관계에서 오는 부정의 기운을 희석, 상쇄, 무력하게 할 만큼 좋은 기운을 사적 관계에서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을 1.4배 강하게 받아들이고,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3배 이상 오래 간직합니다.*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힘? 저자 박상미의 ‘세상을 바꾸는 15분’ 가운데)
좋은 사람의 말은 쉽게 잊으며 기억해내지 못하고,
나쁜 사람과 좋지 않은 기억은 오래 잊지 않으며 힘들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자주 더 깊이 행복감을 느끼게 긍정적 감정을 1.4배 이상,
좋은 기억을 3배 만들어 내면 됩니다. 이웃 동아리 활동이 그런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웃에게 둘레 사람과 느슨하게 어울리는 '동아리 활동'을 제안합니다.
가끔 모여 특정 주제에 관해 생각을 나누거나 함께 활동합니다. 그렇게 일상을 공유합니다.
지식도 얻고 이웃도 사귑니다. 좋은 기운을 얻습니다. 삶의 윤기가 흐르게 합니다.
제3의 공간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제3의 공간이 있습니다. 제1의 공간이 집, 제2의 공간은 직장입니다.
제3의 공간은 격식이 없고, 수다가 있고, 소박 하고, 음식이 있고,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찾아가면 언제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맞아줍니다.
그런 공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웃 동아리가 그런 공간입니다.*
(*<제3의 장소>(레이 올든버그, 풀빛, 2019)에서 가져온 생각입니다.
책의 부제는 ‘작은 카페, 서점, 동네 술집까지 삶을 떠받치는 어울림의 장소를 복원하기’
미국 사회 곳곳의 제3의 장소를 연구했던 저자는 제3의 장소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제3의 장소 요건이기도 합니다.
중립지대에 존재하고(제1공간과 2공간에 위치하는 중립, 계급 경제를 따지지 않는 균형),
대화가 있고, 접근성이 좋고 편의가 제공되고, 단골이 있고, 소박한 외관을 가지고 있으며,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또 하나의 하나의 집처럼 따뜻함(온기)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런 제3의 장소는 새로움, 균형 감각, 윈기 회복의 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주 만나는 친구나 이웃을 사귈 수 있고, 그들의 삶에 윤기와 활력을 주었습니다.
“최고의 제3의 장소는 하루 중 언제 가더라도 아는 얼굴이 있을 터이니 아무 때나 거리낌 없이 혼자 갈 수 있는 곳이다.”)
이웃과 격식 없이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며, 출입이 자유롭고, 소박하며,
찾아가면 언제든 나를 알아보고 맞이해주는 공동체. 이런 모임을 기획하고 구성하고 제안합니다.
다양한 여러 모임에 참여하게 거듭니다. 이로써 좋은 이웃 한 명만 사귀어도 사는 재미를 느낍니다.
생활에 윤기가 흐릅니다. 우리 마을이 살 만한 곳이 됩니다.
행복한 사람 옆에는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모여 나누면 행복이 배가 됩니다.
그 행복 바이러스의 전염성은 어마어마하여 마을 전체를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일상을 혼자 보내고, 자주 외로워합니다. 고독하다고 느낍니다. 한국인 10명 7명은 외롭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20명 중 1명은 ‘항상 외롭다’고 느꼈습니다.(파이내셜 뉴스, 2017.8.28.)
시대의 변화에 따라 둘레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지, 관계 그 자체의 의미가 사라진 것일 리 없습니다.
온라인으로 초연결된 사회를 살아가며 얻는 피곤함이 고독을 찾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SNS 친구는 넘쳐나지만 온라인에서 ‘외롭다’는 말의 언급이 4년 새 10 배로 늘어났습니다.(경향신문. 16.02.26)
어울리고 싶지만 거절이 두렵거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능과 먹방’이 뜨는 시대 뒤편에는 관계와 소통 능력의 퇴화가 맞닿아 있습니다. 누군가 관계를 거들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한 단어 ‘외로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한 문장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마음 맞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제3의 공간’이 절실한 때입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 입니다.
일상 속에서 꾸준히 가꿔갑니다.*
(*한국의 1인 가구 비율이 전체의 약 30%가 넘습니다. 홀로 지내는 가구는 빈곤, 돌봄, 고립과 같은 문제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이 없다면 이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반면, 풍성한 인간관계와 같은 사회적 자본은 이런 문제를 이겨낼 힘을 줍니다.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시장 자본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해볼 만하고 잘할 수 있습니다.
이웃 동아리 활동은 우리 사회 문제의 핵심에 대응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복지관이 이 시대를 위해 나서야 하는 절실한 실천입니다.)
환경이 마음을 지배하고, 그 환경 가운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사람입니다.
그 사람 가운데 행복감을 주는 주요 존재는 가족과 친구(이웃)입니다.
따라서 이웃 동아리 활동의 주제도 가족과 가까워지고 이웃과 사귀는 활동이면 좋겠습니다.
가족 단위로 함께하는 이웃 동아리 활동도 좋습니다.
약자의 바탕, 지역사회
지역사회는 ‘약자가 살아가는 바탕’입니다. 이런 바탕이 튼튼하면 그 속에서 약자는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이웃과 인정’이 튼튼한 바탕의 핵심입니다. 우리 지역사회를 이웃이 있고 인정이 흐르게 합니다.
그런 지역사회에서는 약자도 살 만합니다. 약자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이웃과 인정을 살리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이웃 동아리’입니다. 취향 공동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도 때때로 이웃과 함께하고 싶을 때, 함께하고 싶은 주제로, 함께할 수 있을 만큼 만나 어울립니다.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경험이 문제를 예방하고 억제하고 희석하고 감당하게 하는 우리 지역사회의 탄력성을 키웁니다.
어울려 살아본 경험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게 합니다. 나의 일로 여기고 기꺼이 함께하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웃과 인정’이 지역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근본책입니다. 복지관 사회사업의 이상입니다.
그 ‘이웃’이란 존재도 한 명이면 충분하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훔친 장발장은 그 때문에 19년을 차갑고 더러운 감옥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를 새로운 길로 안내한 이는 미리엘 신부. 그 한 사람의 존재가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 했습니다.
다양한 이웃과 교류하는 가운데 절망에서 길이 보이고 울체된 마음이 뚫리는 경험을 맛보게 될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고통을 낫게 하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신이 속한 사회와 유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안다.
사회에 편입되는 것이 생명 유지를 위한 급선무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그랬다.
고립된 인간은 수많은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세상을 등지고 동굴에 숨어 사는 은자라든가 하는 반증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 은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것 자체가 고립된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 일반적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집단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기보다는
되도록 다양한 사회적 조직에 몸담고 다층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넘치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처방> (크리스텔 프티콜랭, 부키, 2014))
(**만약, 지옥이 존재한다면 가난·고통·질병이 있는 곳이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인 곳일 겁니다. 반면,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서로 신뢰가 없거나 혹은 적당한 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 동아리 활동은 어떤 지옥이든, 그곳에서 탈출을 위해 ‘신뢰와 거리’를 생각하며 어울리게 거듭니다.)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 저자 세실 앤드류는 사회 변화는 거실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책의 영문판 제목이 ‘Living Room Revolution’입니다.)
거실에서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대화’할 때 협력적 문화가 만들어지고,
그런 문화가 결국 타자를 대하는 사회적 포용력을 높게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수시로, 다양한 이들과 유익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넘치는 즐거운 저녁을 만들기만 하면
‘외로움’으로 병들어 가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니, 해 볼 만합니다.
문제는 누군가 제안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 제안을 자신 있게 해볼 만한 사람이 바로 사회복지사입니다.
느슨한 모임이 절실한 시대
청년들 사이에 돈을 내고 책을 읽는 모임과 같은 동아리 활동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둘레 사람을 알아가고 싶지만, 용기가 없고 정보가 없습니다.
돈을 내고서라도 검증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공통 관심사만을 공유하는 모임을 원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만큼만 관계하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온라인 관계망의 한계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난 적 없고, 앞으로 볼 일도 없는 이의 ‘좋아요’가 공허하게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알아온 가족과 친구 관계 속에서는 이전과 다른 ‘지금’의 나를 말하고 이해받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사람과 겸상하느니 차라리 혼밥이 낫다는 이들은 많습니다.
많은 것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인간관계보다 필요한 만큼만 만나고 언제든 그 관계를 멈출 수 있는 순간 관계를 원합니다.
‘관계’라는 중심은 더욱 붙잡지만 형태는 다양해진 공동체를 상상합니다.
이웃 모임을 주선한다면 이런 흐름도 관심 있게 살펴봅니다. 느슨한 모임을 원하는 시대입니다.
한국 사회 여러 청년 활동의 핵심에는 마음을 읽어주고, 공동체를 만들어주고,
공동체 사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세 흐름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생활세계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이루어졌던 이 세 가지를
이제는 누군가 주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어디에서도 살피지 않기도 합니다.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나서야 하는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첨단 자본의 상품이나 거짓 종교의 광풍이 그 빈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진실한 이웃 관계가 더욱 절실한 시기입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모든 거래에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이런 사회 속에서는 네트워크(관계, 공동체)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 비용을 지불하는 시대입니다.
비용만 있으면 온갖 만남이 가능해진 시절이지만, 그럴수록 여유 자본이 없는 이는 더욱 외롭습니다.
드라이브-스루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동 수단이 없는 이는 더욱 고립됩니다.
스마트폰 앱 터치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터치 도구와 정보가 없는 이는 더욱 소외됩니다.
인간성을 마음에 두고 인간애를 붙잡는 이들의 역습.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나설 때입니다.
복지관 사회사업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둘레 사람과 좋은 관계는 ‘당사자의 삶, 지역사회 사람살이’를 세우고 지탱하는 바탕입니다.
튼실한 관계망은 문제 대처와 해결의 원천입니다.
풍성한 인간관계와 이웃 관계가 역경을 이겨내는 탄력성이 됩니다.
둘레 사람과 좋은 관계가 있다면 외로움과 고립과 소외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청년 사이 신조어 ‘홀로움’. 혼자 있고 싶은데 또 외롭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청년 사이에서 온갖 사교모임이 유행입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내고 모임에 참여합니다.
참가비가 사람을 보증해주니 그 속에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홀로 지내더라도 때때로 함께 어울리는 삶의 균형이 전 세대에 걸쳐 중요한 때입니다.
복지관은 금융 자본이 없어도 사회적 자본으로 홀로움을 이겨내게 돕는 곳입니다. 복지관의 역할이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다행인 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복지관과 사회복지사는 선한 일을 하는 곳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곳에서 주선하는 이웃 모임이라면 믿음이 갑니다. 신뢰가 모임을 찾게 만듭니다.
옆집은 있어도 이웃은 없다는 시대이지만, 서로 무관심한 이웃을 변하게 하는 것도 결국 이웃입니다.
이웃이 이웃을 고귀함으로 이끕니다. 단, 누군가 주선할 때 가능합니다. 그 주선의 결과가 ‘이웃 동아리 활동’입니다.
사회복지사사무소 ‘구슬’은 지역사회 여러 문제의 원인을 ‘관계의 단절’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복지관의 핵심 업무를 ‘관계의 생동’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관계를 살릴지’ 알맞은 방법을 궁리하고 바로 해볼 만한 일을 제안합니다.
다양한 관계 생동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웃 동아리 활동’과 같은 공동체를 꾸리는 일입니다.
세실 앤드류에 따르면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한 곳으로 평가받는 덴마크에서는
인구의 95퍼센트가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당장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고, 주민들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 동아리 안에서는 다양한 사람이 허물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다채로운 이웃 동아리 활동 주제는 주민들의 감춰진 강점을 드러나게 하고 생동하게 하는 계기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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