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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래사회와 사회복지 : 3부_인공지능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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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복지플랫폼 10주년 특집 칼럼 '미래사회와 사회복지']

1부 사회사업과 외로움

2부 사회사업과 기후위기

3부 사회사업과 인공지능





인공지능과 사회사업




지초북행(至楚北行)


위나라 왕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려 하자 계양이 이 소식을 듣고,

가던 길을 돌이켜 급히 왕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오다가 큰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북쪽을 향해 수레를 잡고 제게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에 가려고 합니다.” 했습니다.

“초나라에 간다면서 어찌하여 북쪽으로 갑니까?”하니, “내 말은 잘 달리거든요.” 했습니다.

“말이 잘 달려도 이 길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니, “나는 돈이 많거든요.” 했습니다.

“돈이 많아도 이 길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니, “나는 말을 잘 몰거든요.” 했습니다.

이런 수단들이 좋을수록 더욱 초나라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 이상과 철학이 없거나 바르지 않으면,

풍부한 예산 좋은 시설 뛰어난 기술로써 열심히 할수록 反복지로 치달을 위험이 커집니다.

[복지소학] (한덕연, 사회복지정보원, 2021) 가운데 ‘定向正道’.



사회사업도 그러합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이고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런 이상을 설정하지 않고는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돕고 사회를 사회답게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그런 이상이 없다면 기술(도구)이 좋은들 무슨 소용입니까.

방향 없이 나섰다가 오히려 사회사업에서 멀어질까 조심스럽습니다.

사람을 도구로 소모하고 사회를 분열하는 데 놀아날까 두렵습니다.

이상이 분명하다면 이를 향하여 사용하는 도구는 유용합니다. 도구의 한계도 이해하며 수용합니다.


여기 최첨단 전기차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최신형으로 갖췄습니다.

그런데 차가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유는 무얼까요?

지금은 운전자가 없어도 자율주행 기술로 운행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목적지’입니다. 최첨단 내비게이션에 도착지를 입력하지 못하면 차는 출발할 수 없습니다.


사회사업social work으로 돕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에 이상을 설정하지 못하면

초인공지능을 갖춘 사회사업가일지라도 꿈쩍할 수 없습니다.

사회사업 지도에서 당신이 향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고 어떤 사회에 살고 싶습니까?

인공지능과 로봇을 말하기 전에 이것을 먼저 밝혀야 합니다.

당사자와 지역사회가 복지를 이루고 더불어 살게 하려는 기술인지,

혹은 내가 벌이는 복지사업을 손쉽고 신속하게 처리하려는 기술인지를 묻지 않고 시작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가는 길인데 도구가 뛰어나다면, 결국 돌아올 길만 멀어질 뿐입니다.

육체노동을 해방하는 ‘로봇’과 정신노동을 해방하는 ‘인공지능’은 무엇을 위하여,

무엇 때문에 사용하고자 하는 일인가요? 그런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요?


인공지능, 그렇게 놀라운 일일까.

80년에 컴퓨터가 나왔을 때 그러했고, 90년에 인터넷,

2000년에 검색엔진, 2010년에는 스마트폰이 그랬습니다.

다시 10년 뒤 인공지능을 마주합니다.

10년 주기로 경험하는 최첨단 기술이 정말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기술이 당사자가 자기 삶을 살고 지역사회가 더불어 살게 도와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확인하며 확신할 수 없으니, 사회사업에서 인공지능 활용이 놀라운 기술로 와닿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만나는 당사자를 공감하고 위로와 응원을 보내는 일에는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이 그리 필요해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 미국 농부 철학자 웬델 베리는

[나에게는 컴퓨터가 필요 없다*]에서 기술 진보 목적이 지역공동체 통합과 가족 행복을 위함인지,

신에 대한 사랑을 향함인지 살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 도구가 단지 돈과 편리함이란 원초적 욕망을 향하는 기술이라면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돈과 편리한만을 쫓는다는 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숫자로 검증할 수 있는 ‘결과’만을 추구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인공지능이 아니어도 맑은 자연 속에서 가슴 시린 서시를 썼습니다.

조정래 작가는 빅데이터가 없었어도 수첩과 발품으로 방대한 서사를 완성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당사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게 풍부한 정보일지 깊은 사유일지,

그것에 따라 최첨단 기술사용은 선택적입니다.

우리 사회사업 현장에서 인공지능이 대신할 일이 있고 여전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 이를 구분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변치 않는 마음과 변화한 기술을 병행하며 당사자를 응원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 없다_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인간과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웰델 베리, 양문, 2002)



불완전한 인간이 사용하는 완벽한 인공지능


OpenAI 챗GPT, 구글 바드, MS 빙과 같은 러닝머신의 놀라움을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에 기반을 두어 명령자의 질문과 동시에 보여주는 답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에게 질문해왔습니다.

그동안은 불완전한 인간을 믿을 수 없어 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제는 바로 답하지 않는 신을 대신하여 인공지능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답은 인간 지식 총합에 따른 통계와 확률의 결과입니다.

질문자는 그 답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 때문에 물었으며,

지금 답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최첨단 기술로써 내놓은 즉각적인 응답을 ‘정답’으로 인식하는 순간,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이 생겨나는 겁니다.

도구로써의 인공지능의 한계는 분명한데, 도구를 신神으로 여기는 맹신盲信이 무섭습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도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겉보기에 세련된 사고와 언어를 보여줄지라도

‘비지성에서 비롯한 도덕적 무관심’이 존재한다며 우려했습니다.*

*<나누는사람들> ‘2023년 봄호’에 실린 <뉴욕타임즈> 2023년 3월 8일자 기고문 인용


챗GPT 등장 이후, 많은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질문하는 가에 따라 인공지능의 답이 달라집니다.

이미 인류의 모든 지식은 어딘가에 존재하기에

무엇을 어떻게 질문하는 가에 따라 탐색과 조합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최근 챗GPT 교육의 대부분이 질문하는 방법의 학습입니다.

더욱 인류는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로봇시대 인간의 일*]에서는 인간을 인공지능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호기심’이라 했습니다.

인공지능 열풍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 그런 인공지능의 정확성.

불완전한 인간의 불안한 명령도 정확히 수행해 내는 인공지능.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더욱 더 인간의 본질 탐구를 이어가야 합니다.

여전히 명령자(사회복지사)의 고민으로 가져와 탐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성찰을 멈추고 도구의 활용만 탐구한다면,

불완전한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질문을 다듬어갈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 쌓여 만들어낸 엉뚱한 답을 인공지능이 정확하게 제시하는 순간,

사회사업이 추구하는 사람과 사회의 모습이 우리 이상理想에서 벗어나 이상異常해질 수 있습니다.

* [로봇시대 인간의 일_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야 할 이들을 위한 안내서] (구본권, 어크로스, 2021)



실천 진보와 도구(인공지능) 진보를 구분하기


기술 발전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기술 발전은 우리 사회 다양한 영역에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 사이 관계를 생동하는 사회사업가로서,

특히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다양한 형태의 기술 발전은 고맙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기술은 중립적입니다. 기술이란 마치 칼과 같아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는 가에 따라 당사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위협이 되거나 상하게도 합니다.*

바늘은 옷을 수선하고 상처를 꿰맬 수 있지만, 뜻밖에 고문 도구로써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상과 의도’를 살피는 일이 먼저일 겁니다.

*어르신 돌봄 수단으로 등장한 로봇이 오히려 어르신의 ‘사회 관계망을 축소’하게 하며,

돌봄 과정에서 ‘노인이 대상화’ 되거나 ‘사생활 침해’와 같은 문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Amanda Sharkey·Noel Sharkey, Ethics Inf Technol, 2012)


또한, 기술 발전으로 얻는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의심합니다.

이익이 커질수록 사회에 환원하는 게 많아지지 않습니다. 이익을 기반으로 권력을 형성합니다.

기술 권력은 이제 그 기술 사용 비용을 청구하기 시작할 겁니다.

지난 역사가 이를 말해줍니다.* 기술의 공공화를 생각하지 않고

기술 발전을 현장의 진보로 쉽게 환영하기 조심스럽습니다.

*무료로 제공하였다 보편화 되면 유료로 전환하는 것들을 많습니다.

최근 구글이 앱 내부 결제 때 수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구글 통행세’.


사회사업 현장도 누군가에게는 이윤을 만드는 시장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사업 현장에서의 첨단 기술 도입과 유지 활용은 누군가에게는 큰 이익이 남는 장사입니다.


‘기술과 관리의 결합’, ‘기술과 자본의 결합’에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기술이 중립이라면,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기 전

사회사업가로 먼저 갖추어야 할 ‘공감’ 같은 것(덕목)이 있을 겁니다.

이런 것을 바탕에 두지 않고 진행하는 ‘기술’을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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