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밖복지 By 노수현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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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란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 시들해진 상태를 말한다. 흔히 쓰는 표현으로 부부 권태기가 있다. 권태기는 부부관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시간의 영향을 받는 일과 관계에도 적용된다. 권태기의 핵심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이다. 만나자마자 권태기가 오지 않는다. 권태기는 반드시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렇다고 시간이 지난 모든 일과 관계에 권태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냥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열정을 쏟은 시간이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부부의 권태기는 사랑의 증거다. 직장의 권태기는 열심히 일했다는 반증이다.
복지에도 권태기가 있다. 지역사회를 따뜻하게 바꿀 마음으로 복지를 시작했다. 동네에서 만나는 주민 한사람이 귀하고 복지관을 찾는 이용자를 마음 다해 환대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주민은 곧 민원인이 되었다. 복지관을 찾는 주민이 버겁다. 지역사회에 나가는 건 피곤한 일이 되었다. 나는 달라진 것인가? 나는 더 이상 복지를 할 수 없는 사람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복지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권태는 나쁜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겪어야 하는 일이고 열정을 쏟은 일과 관계에서 오는 통과의례다. 다만 권태기의 결과가 좋거나 나쁜 것이다. 부부 권태기를 예로 들면 이혼하거나 더욱 성숙한 관계가 되는 차이가 있다. 복지 권태기도 마찬가지다. 더욱 성숙한 복지를 하거나 복지와 이별하게 된다. 결국 권태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권태를 어떻게 감지하고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먼저 복지 권태기를 감지해야 한다. 큰 위험이 오기 전에 작은 위험 신호가 수십차례 온다고 한다. 반복되는 작은 위험 신호를 감지하면 큰 위험을 대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복지 권태기의 작은 위험 신호는 무엇일까? 먼저 사람이 힘들어진다. 사람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이 싫어진다. 예전처럼 주민이 반갑지만은 않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식었다. 둘째,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권태기를 겪는 부부가 결혼과 가정의 의미를 다시 묻는 것과 같다. 나름 확고한 신뢰가 있었는데 이제 복지가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일하는 것의 의미를 묻게 되고 물을 때마다 확신보다는 의심이 앞서게 되면 복지 권태기의 신호다. 셋째,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이 많아진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설레기보다 수두룩한 문제점이 먼저 보인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한숨으로 그치지 않고 제도, 조직, 리더십에 대한 불평이 줄을 잇는다. 사람이 부담되고 일의 의미를 잃고 불평이 많아지면 복지 권태기가 찾아왔거나 진행 중이란 뜻이다.
복지 권태기를 감지했다면 관리가 필요하다. 극복과 해결이 아니라 관리다. 극복과 해결은 권태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이다. 관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 슬픔을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슬픔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거나 억압한 결과이다. 복지 권태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권태기를 나쁘게만 보지 말고 더 성숙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자.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극적인 반전을 꾀하지 말자. 누적된 피곤에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듯 권태기도 시간을 원한다. 다만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말은 아니다.
권태기를 관리한다는 말에는 노력이 포함된다. 소수의 깊은 관계에 집중하는 노력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역설적으로 사람으로 치유된다. 사람에 지쳐 권태기가 왔는데 권태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복지를 실천한다 말은 사람을 만난다는 뜻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는 힘이 든다. 아무리 좋은 관계도 힘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그냥 웃고 떠들며 노는 관계에도 힘이 드는데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에 함께해야 했으니 얼마나 많은 힘이 쓰였겠는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다. 얇고 넓은 관계로 소진된 에너지를 깊은 관계로 채워야 한다. 가까운 소수의 사람과 지금의 상태를 나누자. 복지 권태기의 어려움을 말하자. 그동안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을 했으니 이해받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음으로 복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권태기는 그동안의 시간에 쌓인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을 기회이다. 아는 것 없이 열정 하나만으로 시작했던 복지가 지금 나와 지역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지금 시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복지가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성숙은 모든 것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못하는 일,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한다는 말이다. 권태기를 지나서 이전과 똑같이 살면 손해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최근에 실천 현장의 중간관리자를 만나면서 복지 권태기를 실감한다. 과거에도 복지 권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리하는 방법에 차이를 발견한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과거에는 다른 기관으로 이직을 고민했고 지금은 복지를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직이 낫고 복지계를 떠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의 발전을 위한 길이라면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실천 현장을 생각하면 조직의 허리인 중간 관리자가 떠나는 현상은 뼈아픈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권태기는 열정의 대가다. 일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주민과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권태기도 없다. 적당히 일한 사람에게 권태는 찾아오지 않는다. 사랑의 대가인 권태를 이혼으로 끝내는 것처럼 열정의 대가인 복지 권태기를 이직으로 끝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복지 권태기에는 제도, 조직, 리더십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내 노력만으로 관리되지 않으며 막연히 좋아질 것으로 기대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설사 그만두더라도 앞서 제시한 시간을 가지고 깊은 관계에 집중하며 지난 시간을 반추하는 기회를 충분히 가지면 좋겠다. 조직적 차원에서도 무조건 참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충분한 배려가 필요하다. 중간 관리자 한 명을 잃는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허리가 다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중간 관리자는 조직의 허리다.
이혼율이 낮고 이혼이 흠이 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이혼을 권장할 일도 아니다. 이혼이란 제도에 집중하다가 놓치는 본질이 있다. 같이 살고 안 살고의 문제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성찰이 먼저다. 법원에서 이혼 전에 조정의 시간을 권고하는 것은 비단 이혼을 막자는 뜻만이 아니라 부부관계의 본질과 개인의 성찰 기회를 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문제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볼 때 더욱 잘 보이고 본질적 문제 해결의 시각이 생긴다. 복지 권태기를 겪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시각이 생기면 좋겠다. 그만두고 안 두고 차원에서 벗어나 복지의 시각을 넓히고 본인 인생관과 복지관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그런 후에 떠나도 늦지 않다. 오히려 잘못된 선택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시간을 줄일지도 모른다. 복지 권태기는 어쩌면 열정을 다한 사람에게만 주는 성숙하기 위한 위장된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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