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사유(思惟) By 이두진
- 202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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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 소리가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멀티모달 기술과 관계짓기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서 종종 '기록'은 주민 만나기의 과정에서 필요한 몰입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주민을 앞에 두고 공감과 반영적 경청을 하기도 쉽지 않은데 손은 쉼 없이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주민과의 관계는 때로 결제를 기다리는 행정의 여백 뒤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주민의 눈보다 모니터 위의 커서를 더 자주 바라봐야 했던 미안함은 현장 사회복지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보았을 마음의 짐일 것입니다. 한편 기록 작성 시간의 효율성을 포기하고, 주민과의 만남에만 집중하는 사회복지사에게 추후 기록을 위한 시간 투자는 또 한편의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해외에서 도입되고 있는 멀티모달(Multimodal) 기술은 사회복지사가 주민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희망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기록의 자동화에서 '급진적 현존(Radical Presence)'으로의 회복
싱가포르 가족 서비스 센터(FSCs)에 도입된 ‘Scribe’[1]는 상담 중 음성을 실시간 녹취하고 핵심 내용을 요약합니다.(https://reports.open.gov.sg/scribe/overview) 이 기술은 단순히 타이핑이라는 물리적 노동을 줄여주는 도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상담 중 노트북 화면이 만들던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허물어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복지사는 기록의 강박에서 벗어나 주민의 눈과 이야기에 좀 더 깊게 경청과 공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기술 발달의 시대에 사회복지사가 성찰해야 할 것은 기술의 효율성만을 제고하는 것이 아닌, 주민과 만나는 사회복지사의 적극적 역할 전환입니다. 기술을 통한 행정 작업의 효율성 증가는 사회복지사가 기능적 기록자에서 실존적 목격자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주민의 미세한 목소리 떨림, 말 사이의 긴 침묵, 그리고 짧게 스쳐 지나가는 숨소리까지 온전히 담아내는 ‘급진적 현존’을 고려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기술을 관계의 매개체로 만드는 첫 번째 열쇠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주민은 자신의 이야기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되고 있음을 느낄 때, 비로소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합니다.
2. 성찰의 거울: 전문가의 '감'을 '지혜'로 바꾸는 과정 (SECI 모델의 적용)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새로운 지식으로 만드는 과정(SECI 모델)[2]을 살펴보면, 멀티모달 데이터를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멀티모달 감정 분석(Multimodal Sentiment Analysis, MSA) 기술[3]은 상담 중의 목소리 톤과 미세한 표정 변화를 정밀하게 정량화합니다. (https://www.thetrevorproject.org/), (https://elliq.com/pages/how-it-works)
여기서 데이터는 복지사의 직관을 대신하는 권위자가 아니라, 오히려 전문가의 판단을 정교하게 다듬어주는 ‘성찰의 거울’이 됩니다. 실천 현장의 베테랑이 느끼는 “이분은 오늘 평소보다 더 위축되어 있다”는 판단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소중한 ‘암묵지(비정형화된 느낌)’입니다. 사회복지사는 AI가 읽어낸 “평소 대비 발화 속도 20% 감소”, “시선 처리 하향 고정 비율 증가”라는 ‘형식지(눈에 보이는 데이터)’를 활용해 자신의 직관을 이 객관적 데이터라는 거울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AI는 "안정적"이라 말하는데 사회복지사가 여전히 “위험” 감지한다면, 그 간극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데이터가 놓친 주민의 더 깊은 맥락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데이터상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왜 그 이면의 억눌린 고통이 왜 느껴지는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전문적 지식과 데이터를 대조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작성된 기록은 단순한 사실 나열을 넘어, 데이터가 놓친 주민의 깊은 맥락까지 담아내는 ‘정교화된 지식’으로 승화됩니다. 기술을 사회복지사의 거울로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주관적 편견을 걷어내거나 전문적 직관을 증명해 내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3. 단편적 관찰에서 '공동체 연결과 사회적 자본'의 확장
나아가 인공지능은 개별적인 돌봄을 넘어 지역사회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증진하는 핵심적인 기획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만의 ‘Pol.is’[4]와 같은 AI 공론화 플랫폼은 수천 명의 주민 의견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공통된 합의점을 찾아내어 지역 공동체의 신뢰를 구축합니다. (https://info.vtaiwan.tw/) (https://pol.is/signin)
또한 국내 광주광역시의 '마을e척척' 리빙랩 사업[5]처럼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주민들이 마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오프라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사례는 기술이 '결속적 자본(Bonding)'과 '교량적 자본(Bridging)'을 동시에 생성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https://www.maeuli.com/townE/)
데이터의 범람과 집합 속에서 사회복지사가 가져야 할 근본적 질문은 주민을 고유한 서사를 가진 삶의 주인공이자 공동체의 주체로 존중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기술이 제공하는 정보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주민의 고단한 일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지역사회의 이웃들과 다시 연결하기 위한 마중물로 삼아야 합니다. 데이터를 삶의 맥락을 해석하는 자료로 삼고, 주민의 삶을 한 편의 긴 서사시처럼 읽어내며, 이를 공동체의 관계로 짓기 위한 노력은 사회복지사와 주민, 그리고 주민과 주민 사이의 관계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4. 행정적 사례 관리에서 '강점 중심의 관계짓기'로의 회복
미국의 Binti AI[6]와 같은 솔루션은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사례 기록을 순식간에 분석하여, 클라이언트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성공 경험과 잠재적 지지 체계를 최우선으로 도출합니다.(https://binti.com/) 성공 경험과 잠재적지지 체계를 활용한다는 의미는 '문제와 결핍' 중심의 기록에 익숙했던 사회복지 현장에, 주민의 가능성과 잠재적 자원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이를 통해 강점과 관계 기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복지사와 주민의 수평적 파트너십 입니다. 확인된 강점을 당사자 주민과 투명하게 공유하며 이를 주민에게 확인하고 그 강점이 당사자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를 함께 의논해야 합니다. 기술에 사회복지의 강점관점과 관계짓기의 철학이 입혀지고 설계될 수 있다면, 사회복지사가 주민을 '취약한 지원 대상'이 아닌 '역량 있는 동반자'로 마주하게 돕는 연결의 가교가 될 수 있습니다.
기술 발전이 특이점을 넘어선 시대에 사회복지사의 역할 전환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주는 전문가가 아니라, 주민의 강점을 찾고 지역사회와 연결하는 ‘관계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기술은 방법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문제와 욕구를 정의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실천을 향한 여정
해외의 멀티모달 사례를 찾고 의미를 해석하며 느낀 점은 기술이 사회복지사의 어깨에서 무거운 행정의 짐을 덜어낼 때, 역설적으로 그 비워진 자리에서 비로소 가장 뜨겁고 인간적인 사회복지 실천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사회복지사가 집중해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사자에 대한 개별화, 경청, 공감 등 자기결정 존중 등 주민 한명 한명에 대한 온전한 집중과 지역사회 수준에서 사람 사이의 끊어진 온기를 복원하고 공동체의 연결망을 촘촘히 짜는 일입니다. 기술을 활용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실천적 태도를 끊임없이 성찰할 때, 차가운 디지털 데이터는 따뜻한 관계의 마중물이 됩니다. 의사의 메스와 도둑의 칼이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문제가 더 큽니다. 사유를 외주화하며 결과도 온전히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많아진다면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사회복지현장을 더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기술 덕분에 더욱 인간다워질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요. 인간다움의 징후는 자판 소리가 멈춘 그 자리에서, 사회복지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통해 확인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1]: OGP (Open Government Products) Singapore, "Scribe: AI-powered tranion for social services," (2025).
[2]: Nonaka, I., & Takeuchi, H., The Knowledge-Creating Compan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3]: Bryan G. Victor et al., "Automated Identification of Domestic Violence in Written Child Welfare Records," Journal of the Society for Social Work and Research (2021).
[4]: vTaiwan, "Pol.is: AI-enabled public consultation platform for consensus building," (2024).
[5]: 광주광역시, "마을e척척: 주민 참여형 지역문제 해결 리빙랩 플랫폼 운영 보고서," (2023).[6]: Binti, "Modernizing Child Welfare through Data-Driven Case Management,"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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