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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것을 듣는 일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듣는 일

 

칼럼리스트 소개  

조에스더(엘컴퍼니 대표,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사람을 이해하는 일과 사람에게 닿는 말을 오래 연구하며, 단절된 사람과 사람, 말과 마음을 연결해 온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의사, 판사, 검사, 교수, 정치인, 기업 CEO 등 다양한 전문직과 성인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인간관계, 감정관리를 주제로 강의와 컨설팅 진행. 

 

칼럼 소개 

AI는 점점 더 많은 일을 돕고 있습니다. 기록을 정리하고, 정보를 안내하고, 반복되는 업무를 덜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고, 침묵 속 마음을 읽고, 신뢰감이 가득한 눈동자를 알아차리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칼럼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의 시선으로 복지 현장을 바라보려 합니다. AI 시대에도 왜 대면이 필요하고, 왜 공감은 자동화되지 않으며, 왜 설명과 경청의 힘이 더 중요해지는지, AI로 자동화된 기록에 다 담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삶의 장면과 언어로 차분히 풀어내고자 합니다. 


그냥 좀 힘들어서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별일은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종종 더 묻기가 조심스러워집니다. 정말 별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더 캐묻는 일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말한 만큼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입 밖으로 꺼낸 말보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더 많을 때가 있습니다. 말은 짧지만 그 뒤에 오래된 사정이 있고, 대답은 담담하지만 그 안에 무너질까 봐 붙들고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다 말하지 못할까요? 숨기고 싶어서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도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서운 마음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이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사람은 말을 잃습니다. 내 안에서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타인에게 정확한 문장으로 건네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안에는 내가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생계가 어렵다고 말하는 일, 가족 안에서 지쳤다고 털어놓는 일은 한 사람의 자존심을 통과해야 겨우 나오는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슴 속에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와 당장의 생계, 가족의 갈등과 몸의 통증 그리고 내일에 대한 걱정이 한꺼번에 엉켜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복지 현장에서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말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물론 상황을 확인하고, 필요한 도움을 연결하고, 제도를 안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사람이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감각입니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서툴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이해의 마음입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듣는다는 것은 질문을 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질문은 상대를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보다 “그동안 혼자 감당하시느라 많이 힘드셨겠어요.”에 가깝습니다. “정확히 뭐가 문제예요?”보다 “가장 먼저 덜어졌으면 하는 어려움이 무엇일까요?”에 가깝습니다.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해 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질문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얼마나 오래 참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복지현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때로 제도와 사람 사이를 잇는 일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말과 마음 사이를 이어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마음이 조금씩 말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상대가 말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침묵을 무시하지 않고, 단답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거친 말 뒤에 숨어 있는 무력감까지 성급히 단정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을 말할 수 있을 때 조금씩 정리됩니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말하는 동안 삶은 조금씩 형태를 얻습니다. 복지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복지는 단지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언어를 잃지 않도록 함께 붙들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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